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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3년,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이에 대응해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무차별 공습을 가하면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양측의 반복된 전쟁범죄와 보복을 바라보며,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떠올렸다.영화는 십자군 전쟁 시기의 세 명의 지도자를 조명한다.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4세 △예루살렘 왕국의 기사 발리앙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이다. 초반에 가톨릭 진영의 보두앵 4세와 이슬람 진영 살라딘의 모습을 각각 제시한 후, 보두앵 4세 사후 일어난 가톨릭 진영의 이슬람교도 상인 공격과 이에 대한 보복 전쟁을 보여준다.감독은 종교를 믿음으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믿음보다 선행과 관용을 중시한 주인공들을 보여주며 종교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시간을 제공한다. 종교적 성지보다 민간인의 안위를 우선한 발리앙의 모습을 제시해 평화적 공존의 중요성과 진정한 종교의 가치를 역설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와 동시에 세련된 영상미와 훌륭한 미장센 또한 놓치지 않는다. 볼 때는 재밌게 즐기다가도, 관람 후에는 종교와 평화에 대해 자연스레 성찰하게 된다.감

포스테키안의픽 | 최진현 기자 | 2025-05-28 15:54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밤하늘의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기숙사 옥상에서, ‘우리 사이 은하수를 만들어’라는 음악이 처음 흘러나오던 날을 잊지 못한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는 그렇게 듣게 된 몽글몽글한 OST에 한 번, 섬세한 영상미에 두 번 반해 보게 된 작품이다. 우연히 접한 이 작품은 떠올릴 때마다 늘 미소 짓게 되는 ‘인생 드라마’로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았다.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배타미, 차현, 송가경 세 명의 당당하고 능력 넘치는 커리어우먼과 ‘포털사이트 시장’이란 신선한 배경이다. 오늘날, ‘검색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다. 이 작품은 극 중 여러 에피소드로 시청자들에게 정보화 사회의 이면을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작품 속에 러브라인이 등장하나, 단순하고 뻔한 로맨스물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또 다른 매력 포인트다. 드라마 속엔 의리, 경력 등 풋풋한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들이 속속 등장하고, 그 가치들은 세 주인공이 모두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할 수 있는 열정의 원동력이 된다. 난 계약이 엎어져도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예요. 난 모르거든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래서 하고 싶은

포스테키안의픽 | 양지윤 기자 | 2025-03-26 18:19

‘시라노’는 프랑스의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제작한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작중 주인공인 ‘시라노’는 큰 코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만 빼어난 글솜씨와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춘 인물로, 가스콘 용병대의 대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귀족 여인 ‘록산’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외모 때문에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 그때 ‘크리스티앙’이라는 신입이 가스콘 용병대로 합류하며 뮤지컬은 △시라노 △록산 △크리스티앙 사이의 삼각관계, 그리고 전쟁에 임하는 가스콘 용병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흘러간다. 시라노에는 매력적인 삽입곡이 많이 존재한다. 귀족의 병사들과 싸우기 전 시라노가 부르는 ‘거인을 데려와’,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안녕 내 사랑’, 가스콘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가스콘 용병대’ 등 다양한 분위기를 가진 삽입곡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더불어 전반적으로는 △극 중간중간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대사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노래 △감동을 주는 결말까지 세 박자가 잘 어우러지며 누구나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지난 23일 예술의 전당에서 약 3개월간 펼쳐졌던

포스테키안의픽 | 이주형 기자 | 2025-02-26 20:46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책의 제목 '숨결이 바람 될 때'는 부르크풀크 그레빌 남작의 소네트에서 따온 구절로, 삶과 죽음이 서로 이어져 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이 책의 저자 폴 칼라니티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죽음과 질병을 이해시키는 따뜻한 신경외과 의사였다. 그는 레지던트 과정을 막 마치고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으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순간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어딘가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문장은 한계가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마치 점근선처럼 목표를 향해 끝없이 다가가려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석 달이라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1년이라면 책을 쓰고, 10년이라면 환자를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다짐은 그의 삶의 지침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이 모든 목표를 이뤄냈다.저자는 의사이자 환자로서 자신의 투병 과정을 담담하고도 진솔하게 풀어낸다. 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어딘가 먹먹한 기분은 아마도 그가 너무나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책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채

포스테키안의픽 | 정혜정 기자 | 2025-01-06 09:00

인터스텔라가 개봉 10주년을 맞았다. 쿠 퍼와 브랜드 박사가 애타게 데이터를 찾던 밀러의 행성에서는 1시간 26분쯤 지났을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완벽에 가까운 과학 적 고증과 뛰어난 컴퓨터 그래픽으로, 관객 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황폐해진 지 구를 떠나 인류의 새 보금자리를 찾는 여 정은 우주를 갈망하는 공학도의 가슴을 두 근거리게 만든다. 필자는 처음 인터스텔라를 본 날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물리학 과정을 선행 학습 하던 중 인터스텔라를 처음 접했다. 상대성 이론에 따라 중력이 다른 공간에서는 시간 의 흐름도 다르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날 밤 상대성이론에 관한 유튜브 영상과 책을 마구 찾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필자 는 매년 크리스마스 저녁이면 거실의 불을 끄고 혼자 인터스텔라를 본다. 광활한 우주 여정에 새겨진 복잡한 식과 이론을 통해 스스로 지식의 성장과 한계를 확인한다. 인터스텔라의 또 다른 묘미는 바로 ‘음 악’이다. 밀러의 행성에서 1.25초마다 들리 는 시계 소리는 지구에서 하루의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한다. 만 박사가 불완전 도킹 을 시도하다가 일으킨 폭발 장면에서는 배 경 음악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 지 않는다. 우주에

포스테키안의픽 | 김윤철 기자 | 2024-11-27 14:33

하얀 운동화, 텅 빈 무대, 그리고 한 남 자의 기타. ‘Psycho Killer’의 첫 음이 울리 는 순간, 이것이 그저 평범한 콘서트 필름 이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Stop Making Sense’는 1984년 공개된 이후 지금까지도 ‘최고의 콘서트 영화’로 불리는 작품이다. 무대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끊임 없이 변화한다. 처음엔 데이비드 번 혼자 서있던 무대가 곡이 진행될수록 악기와 밴 드 구성원들로 하나둘 채워지고, 관객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무대의 일 부가 된다. 인터뷰도, 내레이션도 없다. 오 직 존재하는 것은 밴드의 에너지 넘치는 퍼포먼스뿐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공연이 단순한 라 이브 연주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토킹 헤즈 는 자신들의 히트곡들을 완전히 새로운 방 식으로 재해석한다. 우스꽝스러울 만큼 커 다란 양복을 입고 나타난 데이비드 번의 모습부터 멤버들의 즉흥적 움직임, 그 움직 임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그림자놀이와 같 은 조명 연출까지. 이 모든 것이 새롭게 편 곡된 노래들과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실 험적인 연극을 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88분이라는 시간 동안, 토킹 헤즈는 무대 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포스테키안의픽 | 이재현 기자 | 2024-10-30 13:00

난 아이언맨이 못마땅하다. 군수업자 재벌이 자경단 노릇을 하고 다니는데, 시민들은 아무 불만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한 번이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봤다면 이 드라마가 마음에 들 것이다. ‘더 보이즈’는 짧게 말하면, 히어로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의 복수극이다. 메인 플롯은 고전적이지만, 서브 플롯의 메시지는 어떤 사회고발물보다 깊다. 초능력자가 존재하는 공상과학 세계지만 우리의 삶과 소름 끼치게 닮아있다. 이 드라마에서 제일 재밌는 설정은 ‘보우트(Vought)’사다. 보우트는 일종의 슈퍼 히어로 소속사로, 슈퍼히어로들의 활동을 관리 및 홍보하고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대기업이다. ‘바디 포지티브’라며 여성 히어로에게 노출을 강요하는 장면은 현실의 영화 제작사가 생각나 쓴웃음을 짓게 된다. 사고를 앞세워 군대가 히어로와 계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히어로가 “나는 우월하다”라며 막말을 뱉으면 대중들은 솔직하다며 열광한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 은 장면 아닌가? 그래서 주인공들은 결국 슈퍼히어로가 아닌 대기업에 맞서게 된다. 빠른 전개와 깔끔한 선악 구분을 좋아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점점 커지기만 하고, 주인공들은 지긋지긋하게 안 뭉친다. 하

포스테키안의픽 | 김수진 기자 | 2024-09-06 19:24

우리는 타인과 매 순간 마주하며 살아간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까운 타인에 대해선 전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수 년, 수십 년 동안 친분을 유지한 사람에게 도 낯선 면모가 존재한다. ‘가장 가까운 타 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자신도 마찬가 지다. 이 작품은 내면이 성장함에 따라 다 른 이가 보여주지 않던, 내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주인공 소유는 일본인 교환학생 쇼코와 인연을 맺는다. 대학을 졸업한 뒤 영화감독 을 희망하던 소유는 실패를 겪고 가까운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고립된다. 서른에 이 르기까지 그러한 생활을 지속하다 할아버 지를 간병하는 두 달가량의 시간 동안, 소 유는 그동안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맞이한 후, 소유는 다시 만난 쇼코와 지난날 소유의 할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로 늘 무뚝뚝하 던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접한다. 한편 쇼코 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주는 지나친 사랑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한다. 하 지만 그녀는 도쿄의 대학에 합격하고도 고 향을 떠나지 못한다. 책의 중반부에 들어 쇼코의 나약하고 불안정한 모습은 그녀가 오히려 그런 할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있었 다

포스테키안의픽 | 이이수 기자 | 2024-06-12 16:16

우리는 일평생 얼마나 많은 마음을 상상 하고 읽어내게 될까. 가까운 대인관계부터 복잡한 사회생활까지 나를 둘러싼 인생의 미션을 완수하는 데는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 두 가지를 모두 이루려면 자신과 타인의 ‘마음 읽기’가 원활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불투명하고 시시각각 바뀌는 성질을 가져서, 뚜렷한 속을 콕 집어내기가 어렵다. 책 ‘나주에 대하여’는 뾰족한 구석과 예민한 영역, 불안정한 순간으로부터 나오는 못생긴 마음들을 솔직하게 쓴 단편집이다. △질투 △부러움 △열등감 △합리화 △비굴함처럼 누구나 가져봤던 못생긴 마음, 앞으로 가지게 될지도 모를 단편적인 마음이 담겼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부끄럽고 못생긴 내 마음을 읽어내 시원하게 하는 힘이 있다. 단편 ‘꿈과 요리’에는 대학 시절 멀리, 또 가까이서 서로를 바라보던 수언과 솔지가 등장한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을 매개로 미묘한 신경전을 잇던 두 친구는 ‘쟤가 보기에 나는 어떨까?’라는 생각에 얽매여 있었다. 서로에 대한 부러움은 너를 무시하고 싶다는 심술과 맞닿아 있어서, 수언과 솔지는 각기 다른 이유로 진짜 마음을 숨긴다. 누구보다도 능동적으로 영화를 사랑했던 솔지는 졸업 후 은행원이 되며 꿈보다 현

포스테키안의픽 | 손유민 기자 | 2024-05-22 16:01

지난 1월, 쓸쓸한 바람이 부는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를 걸었다. 조용히 색이 바랜 나무들 사이로 활개를 치며 뛰어다니는 강아지들, 놀이터에서 모여 노는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르게 된다. 그저 발 도장에 그치지 않고 마음에 아로새기는 의미를 붙잡기 위해 나는 방문 전 이 책을 읽었다.저자는 세상을 버틸 힘을 잃었을 때 그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이곳의 경비원이 돼 미술관을 지켜왔다. 그는 10년간 많은 미술품을 바라봐 온 방식과 그로부터 힘을 얻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15세기 작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대해 그는 오랜 시간을 견뎌온 그 단단하고도 거친 나무판 위로 템페라가 입혀진 모습, 그리고 시간에 잘게 갈라진 금박 아래로 엿보이는 붉은 진흙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한 작품을 정말 오래 봐야만 알 수 있는 사소한 모습과 선명히 느낀 슬픔까지, 그의 진실한 감상이 부러웠다. 나는 반나절 동안 도장 깨기를 하듯 둘러봐야 하는 여행객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긴 시간과 관찰로부터의 감상을 공유받을 수 있음에 안도를 느끼기도 했다.나는 짧은 시간 동안 영유하듯 빠르게 그림들을 훑다가도, 인상적인 그림 앞에서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서

포스테키안의픽 | 강민영 기자 | 2024-03-22 18:42

이 영화는 크리스 워싱턴이라는 한 흑인 남성이 여자친구의 가족인 아미티지 집안에 초대받아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영화는 극의 초중반 내내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초대된 후에도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며, 주인공과 관객들의 긴장 수위를 높인다. 이는 극의 말미에 가서야 해결된다. 다시 말하자면 극의 초중반은 서스펜스로 관객들의 긴장 수위를 조절하고, 극의 후반은 클리셰로 느껴질 수 있는 스릴러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참신하다. 기존의 사회 문제와 관습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점은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다. 감독은 새로운 소재를 영화에 사용하기 위해 극이 진행되는 동안 영화의 설정을 정당화한다. 이는 점차 쌓이다가 숨겨진 전말이 드러날 때 그 효과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이 영화는 미국 작가 조합이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각본’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제치고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영화를 다시 볼수록 숨겨진 부분이 눈에 보이며 완성도가 매우 높은 영화임을 느낄 수 있다. 여러 번 반복 관람을 하면 보이지 않던 미장센이 보이며 감독이 전하는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인이라서

포스테키안의픽 | 이재현 기자 | 2024-02-29 20:06

모든 사람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중간에 갈림길을 만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지언정 뒤로 걸어갈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추억하기도 한다. 만약 그 길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여기 다시 돌아가는 것을 저주처럼 느꼈을 한 여자가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여자를 중심으로 사건은 흘러간다. 초능력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사이에서 죽을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몇십 번, 몇백 번이고 시간을 되돌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의 이야기 끝에는 그 사람의 죽음이라는 결말만이 존재한다. “이쯤 되니 내가 하는 짓이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도돌이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을 위한 연주처럼 느껴져”라고 말할 만큼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못한다. 작가는 결말을 알면서도 돌아가는 그녀의 비참한 심정을 대사로 처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는 모두가 살 수 있는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문목하 작가의 데뷔작인 ‘돌이킬 수 있는’은 초능력물과 첩보물을 겸비한 장편소설이다. 책에서는 주인공의 능력을 초반에 밝히지 않고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독자가 자연스레 알아 가도록 이

포스테키안의픽 | 이주형 기자 | 2024-01-01 20:03

삶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누군가에게 삶은 행복의 절정이고, 누군가에게는 행복해지려 애를 써야 하는 부담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마땅히 지탱해야 할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모순 속에서 주인공 안진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결단코 ‘나’를 장악하며 한 생애를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고.부유하지만 평온함이 무덤 속과 같다는 이모와 쌍둥이지만 정반대로 팍팍한 시련에 강해지는 엄마를 보며, 안진진은 모순이 빚어내는 불편한 상황들을 대면한다. 그러나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 그 불편 덕분이라는 걸 깨닫고서 제 살길로 향해가겠다고 다짐한다. 남들이 보기에 술주정과 가출을 일삼는 무책임한 아버지는 한편으로, 생각하는 행위가 사람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뿐 아니라 그 용량을 초과하면 곤란해진다는 교훈을 남긴다. 그녀의 삶은 누가 봐도 평탄하지 않았다. 쌍둥이인 이모와 엄마의 모순된 운명을 떠올리자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세상을 원망하기 쉬웠다. 그런 안진진에게 가장 큰 힘은 모순된 세상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한편 무조건 옳지 못한 존재란 없다고 자신을 북돋우는 긍정이었을 테다.책 ‘모순’은 1980년대 여름, 시끌벅적한 세상에 용기를 잃은

포스테키안의픽 | 손유민 기자 | 2023-12-05 20:52

뮤지컬 ‘그날들’이 올해 10주년을 맞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지난 7월 12일부터 9월 3일까지 공연을 진행했다. 지금은 서울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 지방 공연이 한창 이뤄지고 있다. ‘그날들’은 고(故) 김광석이 불렀던 명곡들을 모아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인 만큼, 그의 노래를 즐겨듣는 일반 대중과 뮤지컬 입문자가 보기에도 좋은 작품이다. 경호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안무에 다양한 액션이 가미돼 있으며, 전반적인 극의 분위기가 진중함에도 중간중간 재미있는 요소들과 배우들의 애드리브가 어우러지며 공연의 완성도를 높인다.극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청와대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이야기를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20년 전, 정부가 덮으려 하는 한중수교의 비밀을 알고 있는 통역사인 ‘그녀’, 그리고 그녀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게 된 청와대 신입 경호원 ‘정학’과 ‘무영’은 선택의 기로 앞에서 각자 다른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현재, 대통령의 딸 ‘하나’와 정학의 딸 ‘수지’는 서로에 대한 우정과 경쟁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두 남녀의 실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잘 맞물리면서 20년 전에 있었던 일들의 전말이 점차 밝혀진다.작가

포스테키안의픽 | 오유진 기자 | 2023-11-07 20:34

아기들이 늘 쌍둥이로 태어나 평생 한 ‘켤레’를 지어야만 하는 마을에서 고고는 홀로둥이로 태어났다. 고고는 다른 홀로둥이인 노노와 함께 살게 되지만, 병을 앓던 노노가 마을을 떠나면서 고고 또한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도 ‘홀로’라는 두려움에서 서로를 구했다는 이유로 고고는 그 엉망을 이해해보려 노력한다.책 ‘고고의 구멍’은 빠른 호흡으로 고고의 강단 있는 여정을 서술한다. 북반구의 습지와 협곡, 남반구의 지도리, 마지막으로 새들의 땅까지.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간 고고는 처음 느껴 본 변화의 범위와 세기에 압도됐다. 낯섦에 대한 고고의 깨달음은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고향에 가고픈 그리움을 일깨우기도 했다.더 큰 시련은 ‘어느 날 가슴에 난 구멍’이었다. 처음에 고고는 구멍에 꼭 맞는 무언가를 찾으려 조바심을 냈다. 구멍이 자신을 끝나지 않을 법한 울음과 증오에 차오르게 만든다고 생각했기에, 상처뿐이 남았다. 그러다가 땅에 뚫린 크레이터를 보고 자신의 구멍을 떠올리며 ‘망울’의 크레이터를 메우는 협곡인들을 찾아간다. 협곡에서 고고는 비비낙안을 만나 ‘어떤 상처도 남의 도움으로만 아물지는 않으며, 스스로 아무는 것’임을 배운다. 지도리에서는 소인족인 금

포스테키안의픽 | 손유민 기자 | 2023-09-06 11:54

누구나 자신의 허위적이고 가식적인 면을 자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책 ‘인간 실격’은 이런 인간의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비인간적’인 면을 고발하고 있다. 그런 인간의 특성을 지니지 못한 채로 태어난 주인공 ‘요조’는 타인의 의중과 속마음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결국 자신이 인간으로서 실격되었음을 깨닫는다.요조의 삶은 서문에서 세 장의 사진을 통해 직관적으로 표현된다. 첫 번째 사진은 요조의 유년 시절 사진으로, 그를 원숭이가 웃는 얼굴이라 묘사하며 그가 사람들을 웃기는 광대로 살아왔음을 암시한다. 두 번째 사진의 요조는 인간의 모습을 갖췄으나 여전히 가식적인 모습이다. 이때 요조는 세상에 섞여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세 번째 사진은 ‘안개처럼 사라져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얼굴’이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마침내 요조가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했음을 뜻한다.우리는 언제든지 이방인이 될 수 있다. 타자와의 불확실한 관계 속에서 신뢰를 기반한 교감을 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써 삶의 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운명적으로 고독과 불안을

포스테키안의픽 | 정유현 기자 | 2023-06-15 09:37

프랑스 작가인 아니 에르노(Annie Thérèse Blanche Ernaux)의 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한 사람의 인생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누구나 굴곡진 인생을 살아가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은 한편의 긴 서사 영화 같다. 나는 가끔 누군가의 인생을 담백하게 담아낸 책이 있다면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누군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책을 접하는 것만큼 숭고한 경험은 없을 것이다.이 책은 자전적 성격을 띤다. 누구나 겪을 법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과정을 일기의 형식으로 써 내려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어머니의 언행은 달라져 가고, 작가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느끼는 죄의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마치 우리가 똑같은 일을 겪은 것처럼, 작가의 인생에 초대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흔히 아름답고 환상적인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를 ‘낭만적’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낭만은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치매와 죽음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작가의 낭만

포스테키안의픽 | 이재현 기자 | 2023-03-01 21:20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로맨스 드라마인 도깨비와 태양의 후예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두 작품은 탄탄한 이야기,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연출, 오글거리면서도 감각적인 대사와 이를 완벽히 소화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합을 맞춰 완성된 드라마다. 해당 작품들의 각본을 쓴 김은숙 작가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르의 복수극 ‘더 글로리’로 복귀해 이번에도 어김없이 성공했다.‘더 글로리’는 학창 시절 학교폭력으로 삶이 망가진 한 여자의 치밀한 복수를 다룬다. 주인공 동은은 가해자 5인방에게 고데기로 화상을 입는 등 잔인하고 모진 학교폭력을 당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를 외면하고 동은의 어머니는 딸에게 무관심한 태도로 상처를 주는 등, 동은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이후 그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복수를 준비하고, 계획을 서서히 진행한다. 가해자 5인방의 독특한 설정은 드라마에 재미 요소를 가미한다. 이들 간에는 서열이 존재하며 △악 그 자체인 연진 △연진과 바람피우는 재준 △마약에 의존해 예술 활동을 하는 사라 △5인방 내에서 무시당하면서도 어울려 다니는 혜정과 명오로 구성된다. 이들은 다른 드라마와 달리 서사를 부여받아 악행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포스테키안의픽 | 조원준 기자 | 2023-02-17 22:31

흔히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곤 한다. 즉 자신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이야기인데, 이런 말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나는 감정 기복이 있고,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해도 티가 나는 성격이다. 이런 내게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려면’이라는 제목과 꿍한 표정의 책 표지 삽화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이 책은 제목대로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는 여러 방법을 제시해준다.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을지에 관한 내용을 담았는데, 처음에는 솔직히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뻔한 얘기들만 늘어놓는 게 아닌지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작가의 경력에서 나오는 새롭고 실용적인 여러 방법이 녹아들어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방법은 생각이 많은 성격이라면 그런 생각을 글로 담아보는 방법이었다. 거창하게 글을 쓰기보다는, ‘날씨 노트’라는 콘셉트에 맞춰 그때그때 겪은 감정과 떠올린 생각들을 적어보라는 것이 신선했고, 앞으로 실천해볼 계획이다.갓 스무 살을 지난 학생들에게 감정을 완벽히 다스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 학기 동안 열심히

포스테키안의픽 | 최대현 기자 | 2023-01-07 00:09

다들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말을 흔하게 들어봤을 것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유행한 신조어 ‘금수저’는 영국의 속담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다’에서 유래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동명의 네이버 웹툰을 각색한 드라마 ‘금수저’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더불어 입체적 연출로 몰입감을 높여 지난달 12일 호평 속에 종영했다.‘금수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우연히 얻게 된 금빛 수저를 통해 부잣집에서 태어난 친구와 운명을 바꿔 후천적 금수저가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금수저가 되기 위해 가족을 버린 흙수저 출신 승천과 금수저이지만 돈보다 사랑과 자유를 원해 가족을 선택한 금수저 출신 태용의 상반된 선택과 후회, 주변인과의 갈등이 생생하게 전달돼 흥미를 고조시킨다. 이 드라마는 돈과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꾸려나가면서 시청자에게 돈에 휘둘리는 인생이 아닌,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고 삶의 의미에 관해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주인공 승천을 둘러싼 갈등과 해결 과정에서 입체적으로 묘사되는 감정을 느낄 때면, 행복을 돈으로만 재단하려는 일차원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에 물든 사회에 순응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사고

포스테키안의픽 | 강민영 기자 | 2022-12-10 0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