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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로 살아가다 보면,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 과연 올바른지 문득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새로운 연구 주제를 구상하거나, 지금까지 매진해 온 연구를 정리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갈림길에서는 어떤 기준으로 나아가야 할지 쉽사리 가늠되지 않고, 사람마다 저마다의 판단 잣대가 존재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 곱씹어 보는 작은 화두 하나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이 화두는 연구자로서 처음 발을 뗐던 계기를 떠올리게 해 주고, 지금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한 걸음 더 내디딜 용기를 북돋아 준다.돌이켜보면, 가을이 막 저물어 가던 학부 과정 마지막 학기 말 무렵이었다. 졸업과 함께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막연한 압박감 속에서 나는 미래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친구들은 이미 회사나 대학원에서 각자의 길을 확실히 정하고 있었고, 내 자리에는 불안함을 안고 있는 늦깎이 대학생만이 남아 있었다.한때는 호기심 넘치는 연구를 꿈꾸며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를 품었지만, 뒤늦은 방황으로 내 소중한 이십 대는 어느새 그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품었던 연구자로서의 꿈을 다시 펼치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불

노벨동산 | 오명철 / 반도체 교수 | 2025-05-28 15:56

좀비 바이러스로 세상이 멸망하고, 남은 사람들이 간신히 살아가는 좀비 아포칼립스 물은 △새벽의 저주 △28일 후 △워킹 데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킹덤까지, 수많은 작품을 통해 이제 하나의 대표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다양한 이유로 종말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하루하루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주인공의 처절한 몸부림은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막장 드라마에 손가락질하면서도 빠져드는 것처럼, 아포칼립스 물의 희망과 절망이 엇갈리는 전개는 새우깡처럼 계속해서 손이 가는 묘한 매력이 있다.아포칼립스 작품의 재앙은 다양하지만, 그 속에서도 클리셰(상투적인 이야기 흐름)가 존재하며, 그 중심에는 ‘신뢰의 붕괴’가 있다. 생존을 위해 이룬 조직의 내부 갈등과 조직 간 전쟁, 그리고 개인의 이기심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 나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혼자 살겠다고 동료를 배신하는 장면은 커다란 분노를 유발한다. 공동체를 이루고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상황에서, 이기적인 악당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모두가 종말을 맞는 슬픈 결말도 흔하다.최근 나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가끔 아포칼립스 영화를 떠올린다. △어릴 때부터 행해지는 극도의 경쟁적 선행 학습 △타인과의 끊임없는

노벨동산 | 김원화 / 컴공 부교수 | 2025-03-26 18:16

지난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모든 대학은 정보통신 기술이 어떤 가능성을 가졌는지를 경험했다. 물론 코로나19 사태는 대학 교육에 커다란 시련이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맛보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기간 우리는 교실, 기숙사, 식당 등의 물리적 시설이 없는 새로운 온라인 교육의 가능성을 경험했다. 물론 코로나19 사태 기간에 이뤄진 온라인 교육이 기존의 대면 교육과 비교해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이뤄진 온라인 교육에서 우리는 새로운 대학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런 온라인 교육의 기술적 가능성이 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단지 우리는 그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코로나19 사태에 떠밀려 이를 급히 채택했고, 사태가 진정되자 신속하게 예전의 모습으로 복귀했다. 아마도 학생과 교수 등 이해관계자 대부분이 기존의 교육 방식이 가장 편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기술적 가능성만이 변화를 불러올 수는 없다. 변화에는 번거로움과 위험이 따르며, 그 위험을 감수할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코로나19 기간, 우리는 몇 번의 선거를 진행했다. 코로나19 확산의 위험을 감수하며 많은

노벨동산 | 장수영 / 산경 교수 | 2025-02-26 20:43

‘앗, 버스 놓쳤다. 조금만 빨리 왔으면 탈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버스나 지하철을 놓치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다음에 올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지, 이미 버스나 지하철을 놓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지 않는다.프린스턴대 심리학과 요하네스 하우쇼퍼 교수는 독특하게도 두 종류의 이력서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경력, 연구 실적 등을 빼곡히 기록한 보통의 이력서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실패한 것들을 기록한 ‘실패 이력서’라고 한다.나는 별도의 실패 이력서를 작성해 보지는 않았지만 부끄럽게도 실패 경험을 다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대학교 입시에 실패해서 반수를 했고, 학부 과정과 다른 학과로 대학원 진학을 하면서 대학원 학점도 좋지 못했다. 석사과정에서 박사과정으로 넘어가며 또 실패를 겪었고, 이외에도 각종 신청과 지원을 했다가 떨어진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최근에도 논문과 연구과제에서 좌절을 겪었다. 봄학기 끝자락이 다가오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지만, 가을학기에는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있어서 버틸 수가 있었다. 그런데 늦게서야 받아 든 결과 통지서는 불합격. 눈앞이

노벨동산 | 정덕종 / 산경 대우조교수 | 2025-01-06 09:00

최근 참석한 면역학회에서 내게 가장 재미있었던 연구 내용의 결론 중 하나는 ‘엄마 말씀 잘 듣자. 가려운데 자꾸 긁으 면 안 좋다’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서 우 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가려움을 느끼고, 가려운 피부염 부위를 긁어서 얻 는 만족감 대신, 피부염은 더 나빠질 수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신경과 면역 체 계의 상호작용을 제시한 결론이라 생각된 다. 각 생명 분야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요구되는 연구지만 가장 중요하고 내심 부러운 점은 단순해 보이는 현상을 바탕 으로 단순하고 좋은 과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연구자의 통찰력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정보, 소위 빅데이터에 노출되어 있 으며, ChatGPT와 같은 AI를 통해서 우리 가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또한 비디오 매체 등을 통해서 짧은 시간 내에 필요한 정보를 학습할 수 있다. 과거 에 비해서 과학 연구를 하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전공 서적을 읽고 도서관에서 저널을 찾아 복사해 가 며 공부하는 아날로그 방식의 긴 호흡으 로 공부했던 기억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물론 내가 25년 전 대학원 준비를 했던 학부생 때의

노벨동산 | 김광순 / 생명 조교수 | 2024-11-27 14:33

비록 마음처럼 자주 하지는 못하지만, 학 부 지도학생들과 함께 회식할 때면 학생들에 게 종종 학교생활은 충분히 재미있게 하고 있는지 묻는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아 마도 내가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 느낀 점들 때문일 것이다. 그중 하나는 학생들의 문화 가 내가 학생이던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것 같다는 점이다. 몇 가지를 꼽자면 먼저 선후 배 할 것 없이 경어를 쓰며 같은 과 학생들 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또한 과거에 비해 학생들끼리 어울 려 술 마시며 노는 분위기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받은 느낌들인지라 그것들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요즘 학생들은 학교생활을 어떻게 즐기고 있 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학교생활을 재미없게 보내고 있으면 어쩌나, 라는 아무 근거 없는 걱정이 들게 된다. 나는 2001년 3월에 우리대학 학부 신입생 으로 입학하고 2012년 2월에 박사 졸업생으 로 학교를 떠날 때까지 총 11년을 포항에서 보냈다. 11년이라는 긴 기간을 보내면서 나 는 나름대로 꽤 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했다고 생각한다. 학부 때부터 돌아보면 주말마다 분반 동기들과 기숙사 휴게실에 모여서 고량 주에 깐

노벨동산 | 조성현 / 컴공 부교수 | 2024-10-30 13:00

올해 1월, 우리대학 기계공학과에 부임하게 돼 17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이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제일 한국으로 안 올 것 같았던 내가 한국에 온 것에 놀라움을 표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국이라서 온 게 아니라, 포스텍이라서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오늘은 그 이유와 한 학기를 보낸 현재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포스텍에 오기 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삶’과 ‘무한한 경쟁을 통해 연구에서 성취감을 얻고 세계적인 과학 발전에 기여하는 삶’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가지 삶 중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자니 연구에 미련이 남을 것 같았고, 치열하게 연구만 하는 삶을 살자니 나중에 나이 들면 후회할 것 같았다. 이렇게 갈팡 질팡하는 와중에 먼저 손을 내밀어준 건 포스텍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녀본 적이 없는 나는 포스텍이라는 학교가 익숙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포스텍과 관련 있는 일화는 미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 (UIUC)에서 대학원 생활을 할 때 만났던 선배가 포스텍 학부 출신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이 형은 현재 스위스 로잔

노벨동산 | 김진태 / 기계 조교수 | 2024-09-06 19:21

‘나의 사춘기에게’. 이것은 이미 지나간 나의 사춘기에 대한 다소 새삼스럽고 때늦 은 호명이 아니라, 내가 대학에서 처음 강 의하게 됐을 때 한 학생이 자신의 ‘인생 노 래’라며 추천해 준 곡의 제목이다.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곧 보컬 안지영의 매력적인 보이스 톤과 어우러지며 ‘볼빨간사춘기(BOL4)’ 특유의 감성을 만들 어낸다. 그러면서 다들 아름다운 시절이라 고 입 모아 말하는 청년기의 시작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럼에 도 언젠가는 그 아픔을 딛고 밝게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담하게 이야 기한다. 가사에 담긴 진솔함 때문일까. 이 곡은 발표된 지 7년여가 지난 지금도 마치 자기의 이야기 같다는 이유로 대중에게 꾸 준히 사랑받고 있는 듯하다. 내게 이 노래 를 처음 알려준 학생도 자신이 대학에 와서 도 뚜렷한 목표가 생기지 않아 상상했던 것 만큼 멋진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있으 며, 아직 사춘기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 같 다며 이 곡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청년기는 실로 반짝이고 아름다운 순간들로만 가득 찰 수 있는 것일 까? 혹은 그래야만 온당한 것일까? 나와 함 께 글쓰기 과목을 들

노벨동산 | 김지윤 / 인문사회학부 대우조교수 | 2024-06-12 16:15

우리대학이 개교 이래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다른 학과에도 비슷한 형태의 강좌가 있겠지만, 작년에 첫 입학생으로 출범한 반도체공학과의 학부 커리큘럼에는 신입생들을 위한 ‘새내기연구참여’라는 것이 있다. 학부 졸업 후 32년 만에 돌아온 모교에서 앞길이 창창한 후배들에게 연구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 주면 좋을까 고민이 많았다. 이공계 분야를 처음 접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해야 최대한 흥미를 유발 할지 고민이 많던 찰나, 연구참여를 하는 한 학생의 소개로 이렇게 지면을 빌려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영광이다. 이 기회로 평소 연구에 대한 나의 지론과, 내가 지금껏 관심을 가져왔던 칼코제나이드 반도체 (Chalcogenide Semiconductor)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연구란 무엇일까? 요즘 유행하는 ChatGPT에는 아직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익숙한 사전들을 통해 먼저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해서 깊이 있게 조사하고 생각하여 진리를 따져 보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한자로는 연마할 연(硏)과 끝을 다할 구(究)로 그 뜻을 함축하고 있다. 영문

노벨동산 | 강대환 / 반도체 기금교수 | 2024-05-22 15:59

나는 어린 시절부터 게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게임보이, 닌텐도 시대에서 자랐고, 지금까지 출시된 모든 콘솔 게임기를 경험해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게임의 세계는 해가 갈수록 놀랍게 발전해왔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과거도, 지금도 변함없이 체스다.체스에서는 가능한 수의 조합이 엄청나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다. 각자 첫 3수만 둬도 총 900만 가지가 넘는 포지션이 나올 수가 있다. 4수를 둘 경우 무려 2,880억 가지의 상황이 가능해진다. 방금 내가 한 체스 게임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그렇게 진행된 경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게임임을 알 수 있다. 뛰어난 수준의 재능이나 높은 위험 부담 없이 인류 최초로 뭔가를 이뤄낸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물론 바둑과 같은 다른 형태의 보드게임도 가능한 수순의 조합이 엄청나게 많지만, 체스 말의 모습과 분위기 때문에 나에겐 체스가 더 익숙하게 다가온다.체스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다고 느낀 점은, 체스를 두며 겪는 수많은 상황이 내 인생 속 교훈이 돼준다는 것이다. 흔하디흔한 진부한 얘기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명백한 사실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벨동산 | Joshua Prigge / 인문 대우강사 | 2024-04-22 17:40

이 글에는 영화 ‘아바타2’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벌써 일 년도 넘게 지난 일인데, 첫째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난 다음에 아내와 같이 극장에서 아바타2를 관람했다. 팬데믹 그리고 육아 때문에 아내와 단둘이 극장에 간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영화는 내가 예상한 만큼 우리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갈 무렵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주인공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됐다. 그 와중에도 영화표 가격이 생각나서 ‘엔딩은 보고 나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주인공 아들의 장례식 장면에서, 주인공은 판도라 행성의 초지성체 ‘에이와’에 자신을 연결한다. 그리고 이제는 죽어버린 자신의 어린 아들이 즐겁게 물고기를 잡으며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순간 그 아들이 다 큰 모습으로 주인공 앞에 나타나서 “아빠는 왜 울고 있어요?”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너를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뻐서”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 이후로는 더 이상 영화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극장에서 정신없이 울었다. 오전 시간이라 극장에 사람이 많지 않아 다

노벨동산 | 이재필 / 수학 대우조교수 | 2024-03-22 18:40

어느 날 학과의 선배 교수님께서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하셨다. 한국계 미국인 과학자이자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인 캐럴 계숙 윤이 생태학 및 진화생물학을 주제로 쓴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이었다. 책 표지가 아름다웠고, 제목 또한 흥미로웠기에 나는 금세 호기심을 가지게 됐다. 이 책은 생명의 분류에 기본이 되는 수많은 규칙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자연의 체계’라는 생명의 세계 전체를 체계화한 칼 린나이우스(칼 린네)로부터 △수리분류학 △분자분류학 △진화분류학으로 이어지는 분류학의 발전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동시에 사람들이 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 분류학이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 점차 분류학자들의 주관적인 분류로부터 객관적 데이터에 근거한 현대분류학으로 발전했고,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객관적이지만 불행히도 우리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세계와 단절시키는 비극으로 안내하고 있다고 말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단적인 예는 바로 ‘물고기의 죽음’이다. 진화분류학적으로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정확한 분류군이 아니다. 진화분류학은 생명 진화 계통수 하나의 완전한 나뭇가지, 즉 한 조상의 모든 후손을 포함하고 다른 것은

노벨동산 | 김종흠 / 생명 조교수 | 2024-02-29 20:04

집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 보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소고기뭇국을 끓이게 된다. 때마침 오늘 저녁에도 오색 현미와 카무트를 적당히 넣어서 고슬고슬 지은 잡곡밥과 함께 소고기뭇국을 끓였다. 소고기 양지 국거리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참기름을 두른 냄비에서 살살 볶다가 적당히 익었다 싶으면 얇게 깍둑썰기를 한 무와 표고버섯도 함께 넣고 조금 더 볶는다. 그러다가 다진 마늘, 국간장을 조금 넣고 센 불에서 얼른 버무리다 물을 붓고 팔팔 끓인다. 떠오르는 거품을 가볍게 걷어내고 혹시라도 모자라는 간은 소금으로 약간 해 준 다음 콩나물을 조금 넣고 한소끔 끓이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고기뭇국이 완성된다. 어렸을 때의 식탁을 떠올리면 항상 이 소고기뭇국의 향과 맛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가끔 올라오던 갈치구이, 몇 종류의 나물과 함께 이 소고기뭇국은 식탁에 도란도란 둘러앉은 이미지,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와 함께 진한 맛과 향으로 어린 시절 내 삶의 풍경 한편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직접 음식을 해 먹는 나이가 돼서도 이 소고기뭇국은 옛날 어머니가 끓이던 걸 어깨너머로 본 방식 그대로 끓이게 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내가 끓인 국은 어릴 때 먹던 그 맛과 뭔가

노벨동산 | 서종철 / 화학 조교수 | 2024-01-01 20:01

“제가 어떤 분야 연구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교수님은 언제부터 지금의 진로를 정하셨어요?”학부생들과의 면담에서 항상 듣는 말이자,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말이다. 솔직하게 말할 순 없다. “저도 제가 어떤 연구를 좋아하는지 몰라요”라는 대답은 너무 멋이 없다. 학생들 앞에서 ‘확실한 이상을 가지고 뚝심 있게 나아가는 교수’처럼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내 입을 막는다.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나는 보통 차선을 택한다. 학부 연구참여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구 분야를 계속해서 바꿔온 역사를 얘기해주는 것이다. 나도 모른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우아한 방법이라 자평한다. 단점은 말이 길어져서 상담 때마다 반복해서 들려주기 피곤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면에서 짧게 소개하고, 앞으로는 이 기고문을 읽으라고 말해줄 예정이다.나는 학부 전공을 결정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물리를 좋아했는데, 남들보다 잘할 자신은 없어서 포기했다. 다른 학과에서 어떤 걸 공부하는지 잘 모르니까 무학과 기간에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학과 기간은 MT에 몇 번 다녀오고 나니 정말 쏜살같이 끝났고, 전공 선택의 시간이 코앞으로 닥쳐왔다. 아직도 내

노벨동산 | 이재호 / 전자 조교수 | 2023-12-05 20:51

정교한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자 인간만이 가진 삶의 특권이다. 나는 매년 학부생들에게 추상적인 자동기계를 만들고 그 특성을 탐구하는 계산이론 과목을 가르친다. 수업 시간에 다루는 기계는 형식적인 기호들로 부품과 동작이 정의되는 추상적인 기계일 뿐이지만, 주어진 법칙하에서 사용 가능한 부품들을 조립하고 기계를 만드는 원리는 현실 세계의 물리적인 기계와 원칙적으로 다를 게 없다. 이런 정교한 기계를 탐구하는 작업이 우리 삶과 세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을까? 20세기 중반에 이 순수한 이데아 세계 속에서 어떤 보편 계산 기계 하나가 발견됐고, 그것이 다양한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우리 앞에 존재하는 컴퓨터가 되었다는 이야기. 이 역사적 신화를 들려줄 때면, 나는 어느새 관념론자가 돼, 학생들에게 ‘정신’과 ‘물질’ 중에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이라 생각하는지를 던지듯 물어보곤 한다. 이때, ‘당연히 물질이 근본적이고 모든 것들을 환원적으로 설명한다’는 통속적인 답변을 마음속에 담아두었을 학생들을 위해, ‘기계’에 관련한 몇 가지를 끄적여 본다. 기계의 기능은 ‘개별부품의 기능이 무엇이었는지’와 ‘그들이 어떤 구조로 결합돼있는

노벨동산 | 조민수 / 컴공 부교수 | 2023-11-07 20:34

누군가에게 내 소개를 할 때 “저는 열유체를 연구하는 기계공학과·원자력공학과 소속의 교수입니다”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나의 전공을 대표하는 말은 ‘열유체’인데, 솔직히 말하면, 20년 전의 나는 저런 단어가 세계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지금의 내가 20년 전의 내게 답하자면 ‘열유체’라는 건 ‘열이라는, 우리가 흔히 느끼는 뜨겁다 혹은 차갑다의 기준이 돼주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액체 혹은 기체 상태의 유체 전달’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추상적인 설명이 20년 전의 내게 이해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참고로 나는 20년 전에 우리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고등학생이었고, 몇 년 후에는 실제로 그 목표를 이뤄 아주 만족스럽게 대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본인이 고등학교 때까지 원하던 어떤 목표가, 대학에 들어와서 실제로 배워보니, 그저 존재하던 그 분야에 나 자신이 무언가 판타지를 만들어 좇아온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사람들이 깨는 순간이 가끔 있다. 책상에 엎드려 자다가 책상을 발로 차면서 깨듯이, 적당한 습도와 시원한 온도를 만끽하면서 귓속에서 나오는 리듬을 타고 달리던 가운데에 갑자기 멈춰 서듯, 그렇게 갑자기 깰 때가 있다. 아주

노벨동산 | 조항진 / 기계 부교수 | 2023-09-06 11:52

내 전공인 식민지 시대 소설은 밀도 높은 국문학 연구사가 축적돼 있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연구사의 벽에 좌절도 했고, 논문 주제를 잡기 위해 집을 나오기도 했다. 눈에 밟히는 어린 딸을 돌보며 논문 쓰기가 쉽지 않아서, 육아를 하더라도 밤에는 논문을 쓸 개인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살고 있던 아파트 바로 앞에 독서실 같은 공부방을 얻었다. 생활과 공부의 분리라는 명목으로, 신림동의 15만 원짜리 월세방을 얻어 출퇴근했다. 이때 몇몇 학교에서 전공 강의를 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나에게 강의는 하루 종일 갇혀있던 작은 공부방을 탈출할 수 있는 합법적 외출로, 출력한 소논문의 박제된 지식을 누군가와 토론할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의 장이었다.박사 논문을 쓰면서 가장 오래 한 수업은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의사소통 과목으로 읽기와 쓰기, 토론이 필수적으로 병행된다. 5학기 정도 지나니, 어느 날 문득, 강의실에 앉아 있는 신입생들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부단히 글을 썼던 식민지 작가, 유진오, 이효석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고뇌 어린 열정과 치기 어린 자부심, ‘문청(文淸)’의 성립, ‘지(知)’의 자율성과 같은 박사 논문의 주제가 떠올랐고 192

노벨동산 | 백지혜 / 인문 대우부교수 | 2023-05-19 10:21

기존의 체계를 새로이 전복적으로 재편성하는 이른바 ‘와해적 기술’로서 블록체인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탈근대시대의 철학 및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신뢰 가능한 매개자 없이 P2P 네트워크 방식에 기초하는 블록체인 기술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바로 탈중앙화라고 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신뢰의 새로운 아키텍처’로 기능함으로써 기존의 중앙화된 체계에 대한 혁신적 균열을 가속화하고 있다. 지능정보사회에서 더 심화하는 데이터의 중앙화에 대한 시민사회에서의 우려는 탈중심적이고 분배적인 네트워크로의 전환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의사결정의 권한과 책임, 통제권을 분산시키는 데이터 거버넌스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청이 강화돼 온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이는 기술적 자유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프라이버시 및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권리 주장과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프라이버시 보호의 대중화와 자유주의적 권리 주장은 인터넷 기술을 배경으로 하는 사이버펑크 운동으로 전개 및 발전되기도 했다. 사이버펑크는 개인의 사적 자유를 확보하고 정부 권력을 약화시키며 그 운영과정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데 있어, P2P 기술과 암호화를 유용

노벨동산 | 정채연 / 인문 대우부교수 | 2023-03-01 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