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구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연구를 할지 모르겠어요
  • 이재호 / 전자 조교수
  • 승인 2023.12.05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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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떤 분야 연구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교수님은 언제부터 지금의 진로를 정하셨어요?”

학부생들과의 면담에서 항상 듣는 말이자,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말이다. 솔직하게 말할 순 없다. “저도 제가 어떤 연구를 좋아하는지 몰라요”라는 대답은 너무 멋이 없다. 학생들 앞에서 ‘확실한 이상을 가지고 뚝심 있게 나아가는 교수’처럼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내 입을 막는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나는 보통 차선을 택한다. 학부 연구참여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구 분야를 계속해서 바꿔온 역사를 얘기해주는 것이다. 나도 모른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우아한 방법이라 자평한다. 단점은 말이 길어져서 상담 때마다 반복해서 들려주기 피곤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면에서 짧게 소개하고, 앞으로는 이 기고문을 읽으라고 말해줄 예정이다.

나는 학부 전공을 결정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물리를 좋아했는데, 남들보다 잘할 자신은 없어서 포기했다. 다른 학과에서 어떤 걸 공부하는지 잘 모르니까 무학과 기간에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학과 기간은 MT에 몇 번 다녀오고 나니 정말 쏜살같이 끝났고, 전공 선택의 시간이 코앞으로 닥쳐왔다. 아직도 내가 공부하고 싶은 걸 몰랐기에, 결정에 관한 고민이 많았다. 그때 한 선배가 말했다. “전자과는 스펙트럼이 넓어서 분야를 조금 나중에 결정해도 괜찮아.” 그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서 전자과로 진학했다.

대학원 선택도 어려웠다. 이 분야도 재밌었고, 저 분야도 재밌었다. 흥미도로 결정하기엔 차이가 너무 근소했다. 좋아하는 걸 모르겠다면, 대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야를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통신 트랙 과목들에서 학점이 잘 나왔으니, 통신 분야로 결정했다. 그런데 대학원 지원 과정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를 하고 싶은지를 담은 ‘연구계획서’를 요구했다. 또다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는 분야가 몇 개 없었고, 연구계획서를 자세하게 쓸 정도로 아는 분야는 더더욱 없었다. 급하게 구글링을 시작했고, 학부 프로젝트들을 하면서 주워들었던 ‘압축센싱’과 ‘정보이론’을 위주로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연구계획서를 완성했다.

진학 이후에도 방황은 계속됐다. 대학원에 도착한 첫날, 함께 커피를 마시며 연구실 선배가 말씀해 주시길, 내가 희망하던 분야에서는 취업시장이 불황이라고 했다. 게다가 이 분야에서는 ‘족보’를 따지는 일이 많은데, 하필 우리 지도교수는 6두품이란다. 눈앞이 아찔했다. 그 순간 나는 분야를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지도교수는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네가 압축센싱 프로젝트를 해봤다고 했으니, 압축된 데이터를 갖고 기계학습을 할 때의 수학적 성질을 연구해 볼래?” 기계학습은 잘 모르던 분야였는데, 이것도 공부해 보니 원래 하고 싶었던 분야만큼이나 비슷하게 재밌는 분야였다. 여전히 ‘가장 재미있는 분야’인지는 몰랐지만, 나쁘지 않았다.

박사후연구원 과정 때는 전문연구요원 복무를 위해 귀국해야 했는데, 같은 세부 전공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어 분야를 바꿔야 했다. 그 당시 기계학습 분야에서는 워낙 딥러닝이 뜨거웠고, 딥러닝은 이론보다는 실험이 앞서나간다는 것을 파악했다. 때마침 운 좋게 훌륭한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자리가 났고, 새로운 분야에 적응하는 데 시간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실험은 처음이라 아는 게 없었지만 검색하다 보니 딥러닝 실험에도 압축 분야가 있었고, 다른 분야들보다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적응해서 논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분야 연구를 시작했고, 하다 보니 흥미가 붙어서 지금도 계속 연구하고 있다.

삶의 순간마다 내가 내린 결정들을 생각해 보면, 뚜렷한 장기적 비전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한심할 정도로 근시안적이었다. 그러나 그 궤적을 돌아보면, 내 연구에는 자연스럽게 ‘정보의 압축’이라는 키워드가 생겨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내린 선택들은 아니지만, 지금은 내 선택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학부생들에게도 권한다. 너무 미리 걱정하지는 말고, 바로 연구에 뛰어들어 보라고. 멈춰있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결국은 알 수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