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포스텍에 온 이유
내가 포스텍에 온 이유
  • 김진태 / 기계 조교수
  • 승인 2024.09.0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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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우리대학 기계공학과에 부임하게 돼 17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이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제일 한국으로 안 올 것 같았던 내가 한국에 온 것에 놀라움을 표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국이라서 온 게 아니라, 포스텍이라서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오늘은 그 이유와 한 학기를 보낸 현재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포스텍에 오기 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삶’과 ‘무한한 경쟁을 통해 연구에서 성취감을 얻고 세계적인 과학 발전에 기여하는 삶’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가지 삶 중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자니 연구에 미련이 남을 것 같았고, 치열하게 연구만 하는 삶을 살자니 나중에 나이 들면 후회할 것 같았다. 이렇게 갈팡 질팡하는 와중에 먼저 손을 내밀어준 건 포스텍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녀본 적이 없는 나는 포스텍이라는 학교가 익숙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포스텍과 관련 있는 일화는 미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 (UIUC)에서 대학원 생활을 할 때 만났던 선배가 포스텍 학부 출신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이 형은 현재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교(EPFL) 교수가 된 진짜 천재였다. 포스텍에 대한 인상은 그게 다였다. 

포스텍으로부터 초청받아 방문했을 때는 모든 게 새로웠다. 인원이 적은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탑스쿨 수준의 연구 인프라, 눈부신 연구 실적을 자랑하는 교수님들, 처음 먹어본 장어구이와 제철 대게, 기가 막힌 해변 카페, 투박해 보이지만 정 많은 포항 사람들. 우리대학 첫 방문에서 여러 인상 깊은 요소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인상을 준 것은 우리대학 학부생들이었다. 내가 대학원 때 배웠던 유체역학 내용을 학부 3학년 때 배우는데, 몇몇 학생들은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특이한 친구들이 많았다. 로켓을 쏘고 싶어서 전과한 친구, 선풍기에 꽂혀서 기계과로 온 친구, 무언가 터뜨리는 걸 하고 싶은 친구, 컴퓨터가 너무 좋아 중학교 때부터 코딩으로 돈을 번 친구, 항공우주 관련 부품을 다루는 스타트업을 차리고 싶은 친구, 모든 것을 경험해 보고자 졸업을 늦추려는 친구, 신입생인데도 연구가 하고 싶어 들이댔던 친구 등. 

그렇게 우리대학에 부임을 결정한 후,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연구실 구축이나 제안서 작성, 대학원생 선발이 아니었다. 대신 올 해 1학기에 신설된 항공우주 학생 동아리인 ‘POSTECH aeroSpace Initiatives(PSI)’의 재원 확보에 집중했다. 공식 부임 4개월 전에 기계공학과 학부생들과의 첫 미팅을 가졌는데, 그 시간은 한국 시각으로 토요일 밤 11 시였다. 당시 밤 9시에 국제 A매치가 있어, 축구를 보고 미팅에 참여하려는 줄 알았다. 내가 “축구 보고 다 같이 들어오려고 미팅을 밤 11시에 잡았나요?”라고 묻자, 한 명이 이렇게 답했다. “무슨 축구요?” 이 대답으로 학생들의 공학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미팅을 통해 학생들이 항공우주 분야에 큰 관심과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LINC 3.0 사업단에 제안서를 제출해 동아리 학생들의 항공우주 관련 활동비를 확보했다. 이렇게 판을 깔아주자, 학생들의 단합력과 성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한 학기 만에 28명의 동아리원이 체계적으로 고체연료 기반 TMS(Thrust Measurement System)를 제작했고, 자발적으로 항공우주 연사를 초청해 6개월 만에 추진 실험 및 7명의 항공우주 연사와의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이렇듯, 한국 사회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개인의 행복이 결정되고 성공의 기준이 획일화돼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학생들이 우리대학에 많았다. 개성 넘치고 본인들만의 행복을 찾아가려는 학생들의 인생에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서, 그리고 인생 선배로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학생들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과 잠재력을 발현했을 때 보여줄 비전과 세상을 통해 나도 더 배울 기회가 생긴다면. 문득 이런 삶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뜻깊고 풍부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틀림없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두 가지의 삶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삶의 방향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포스텍에 왔고, 후회 없는 행 복한 삶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