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바이러스로 세상이 멸망하고, 남은 사람들이 간신히 살아가는 좀비 아포칼립스 물은 △새벽의 저주 △28일 후 △워킹 데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킹덤까지, 수많은 작품을 통해 이제 하나의 대표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다양한 이유로 종말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하루하루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주인공의 처절한 몸부림은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막장 드라마에 손가락질하면서도 빠져드는 것처럼, 아포칼립스 물의 희망과 절망이 엇갈리는 전개는 새우깡처럼 계속해서 손이 가는 묘한 매력이 있다.
아포칼립스 작품의 재앙은 다양하지만, 그 속에서도 클리셰(상투적인 이야기 흐름)가 존재하며, 그 중심에는 ‘신뢰의 붕괴’가 있다. 생존을 위해 이룬 조직의 내부 갈등과 조직 간 전쟁, 그리고 개인의 이기심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 나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혼자 살겠다고 동료를 배신하는 장면은 커다란 분노를 유발한다. 공동체를 이루고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상황에서, 이기적인 악당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모두가 종말을 맞는 슬픈 결말도 흔하다.
최근 나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가끔 아포칼립스 영화를 떠올린다. △어릴 때부터 행해지는 극도의 경쟁적 선행 학습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다양성의 말살 △자본에 대한 끝없는 갈증 △도덕성 상실 등은 우리나라를 급격한 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지 알지도 못한 채, 경쟁 속에서 단순하게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고 평가한다. 무한한 경쟁 속에 서로 돌보지 못하는 각자도생의 삶을 보며, 어쩌면 우리가 이미 ‘돈’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가 돼 이 세상을 맹목적으로 떠도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2021년 미국의 Pew Research Center에서 경제선진 17개국 사람들에게 진행한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만 ‘물질적 웰빙’을 1순위로 꼽았다. 다른 14개 나라에선 ‘가족’, 스페인은 ‘건강’, 대만은 ‘사회’가 1순위로 나타났다. 개인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가 철저하게 배제되고, 가치를 위한 수단, 즉 개인의 자산이 맹목적인 목적이 돼버린 사회적 분위기가 매우 우려스럽다. 나는 생각하기에 고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주기에 내가 가치 있는 존재로 완성된다. 공생하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가 없고, 구성원은 생존을 위해 떠돌 수밖에 없다. 필자는 유학 시절 열심히 연구하는 ‘척’을 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에 오피스에 나갔다가, 아무도 학교에 나오지 않아 내가 연구실에 나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 채 홀로 방황하다 집에 돌아간 적이 있다.
포스테키안이여, 내가 살고 싶은 삶,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만약 목표가 단순히 자본이라면,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다른 가치도 함께 고려해 보자. 모든 것을 당장 이룰 수는 없어도, 다양한 가치를 마음에 담아 두고 고차원적으로 사고하자. 자본을 추구하더라도, 자본을 어떤 가치를 위해 사용하고, 그 가치가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고민하자. 그러면 ‘돈’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조금은 생길 것이다. 필자는 주변에서 미국의 삶을 포기하고 왜 한국으로 돌아왔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물론 필자가 단순히 자본을 추구했다면, 아마 지금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가족, 지도하는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기술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 맛있는 국밥 한 그릇 등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 미국에서는 누리기 힘들었고, 나 혼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포기한 것이 아니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찾아 방향을 바꾼 것뿐이다.
모든 좀비 물이 절망적이지는 않다. 좀비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서로를 버리지 않는 전우애,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 피난처, 숨 막히는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탄생하는 새 생명 등은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장면이다. 이런 장면의 중심에는 ‘신뢰의 회복’이 자리하며, 다음 전개를 기대하게 만든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도 나름 이런 희망의 장면을 목격하고 있고,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된다. 포스테키안이 모래알 같은 이 세상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서로를 돌보는 사회로 이끌어 가는 인재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