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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출시된 락스타 게임즈의 창립 20주년 기념작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1899년 미국 서부시대의 끝물을 배경으로, 무법자 갱과 새로운 법질서의 충돌, 그리고 몰락하는 갱에서 주인공의 내·외적 갈등을 다룬다. 이 게임은 △스토리 △연출 △연기 △그래픽 등 모든 방면에서 극찬을 받았고, 역사상 네 번째로 많이 팔린 비디오 게임이 됐다. 게이머들이 아쉬워하는 건 딱 하나, 바로 속도다.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튜토리얼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챕터 ‘콜터(Colter)’는 완수하는 데 약 두 시간이 걸린다. 플레이어는 그동안 설산에 갇혀 기대했던 광활한 오픈월드와 자유로운 인카운터를 즐길 수 없다. 시리즈의 전작 ‘레드 데드 리뎀션’보다 말 타는 속도가 현실에 맞게 느려졌고, 전작에선 어느 때든 쓸 수 있던 ‘빠른 이동’은 본작에선 극 후반부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즉각적인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 시스템은 보통 게임의 적으로 불린다. 하지만 난 이 지루한 미션이 이 게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본다.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단순한 총싸움의 카타르시스보다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느린 플레이를 통해 사용자는 맹목적으로 자극을 찾기보다 캐릭터 사

포스테키안의픽 | 김수진 기자 | 2026-09-09 06:05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는 오늘을 살아내기도 벅찬 어른에게, 우정과 사랑은 안개처럼 희미한 이상에 불과하지 않은가.필자는 오늘날을 ‘정(情)의 상실’의 시대라 부르고 싶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각박한 하루 속, 한없이 자신에게는 관대해지지만, 타인에게 웃음을 잃고 날을 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방어 기제일지도 모른다.소리쳐 작가는 그런 의도에서 ‘명품관의 진상’을 기획하게 됐다. 물질주의가 가장 범람하는 ‘백화점’이라는 배경에서, 진상 손님들을 맞닥뜨리고 이에 대처하는 주인공 ‘오진상’의 에피소드를 차례차례 꺼낸다. 가장 물질적인 공간 속 이야기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에서 점차 잊혀 가는 △우정 △사랑 △신뢰 △꿈과 같은 가치가 반짝이고, 그 가치를 잊고 살아가던 우리의 마음속 상처를 어루만진다. 단지 명품을 사러 온 손님은 명품보다 더 큰 치유를 얻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정을 잃어가는 시대 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을 피워낸 작은 다정함은 상실의 공허함을 크게 채울 힘을 가지고 있다.우리는 누군가에게 이미 진상 손님이 돼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상실을 타인에 대한 날 선 태도로 채우려

포스테키안의픽 | 양지윤 기자 | 2026-03-25 15:55

영국의 시인 M.아널드(M. Arnold)가 자신의 저서 시론에서 “시란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은, 가벼운 글자들로 쓰인 시가 사실 우리의 내면을 무겁게 비추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때때로 스치는 무게를 무시하곤 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 나간 화자가 갑자기 마주한 물웅덩이는 언덕에 진 멍일지도 모른다. 언덕이 아직 많은 토끼를 가지고 있음을 앎에도 사라진 흰토끼 하나를 쫓는 것은 사실 언덕 자체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나름의 노력일 것이다.(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너는 그것을 잘 돌봐줄 것을 당부했다/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그럼에도 때론 우린 “있지도 않은 양 따위, 중얼거린다”(양 기르기). 안희연의 시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사실은 우리 내면에 잔존하던 본질과의 충돌이다.안희연은 시집의 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화자가 여름 언덕을 마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언덕에 멍 진 물웅덩이를 뒤

포스테키안의픽 | 김태린 기자 | 2026-02-26 14:59

상류에 글램핑장을 지으면 마을로 오염수가 내려간다. 타쿠미를 비롯한 마을 주민은 글램핑장 건설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들도 자연을 개발해서 살고 있는 일본의 농지 개척 3세대다. 사업 담당자인 타카하시도 어쩔 수 없이 상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이 상황에서 마을 측과 건설 측 중 어디를 악으로 봐야 할지 딜레마가 생긴다.결말에서 타쿠미와 타카하시는 타쿠미의 실종된 딸, 하나를 발견한다. 하나는 총을 맞은 새끼 사슴과 대치 중이다. 타카하시가 하나를 구하려 하자 타쿠미가 그를 공격한다. 일시에 하나는 부모 사슴에게 공격받은 듯하다. 인간 측 포수가 자연 측 새끼 사슴을 쐈으므로 자연 측 부모 사슴이 인간 측 하나에게 위해를 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타쿠미가 타카하시에게 폭력을 가한 사실은 붕 뜬 명제로 남는다. 타쿠미와 하나를 다른 위치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타쿠미와 하나를 양측 어디도 아닌 양자를 매개하는 중간자에 둔다면 완전한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인간이 자연에 가한 폭력은 중간자를 매개해 인간에게 되돌아온다.내포 저자란 작품 속에 존재하는 저자로, 실제 저자와는 다른 개념이다. 관객은 내포 저자의 시선을 거쳐 사건을 받아들인

포스테키안의픽 | 송명빈 기자 | 2026-01-01 11:48

집에 있어도 집이 그리울 때가 있다. 영화 속 혜원은 부푼 꿈을 안고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마을을 떠나 상경했다. 생각만큼 녹록지 않은 서울 생활로 학업도 연애도 취업도 그 어느 하나 얻은 것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다시금 삶에 열정을 느끼게 된다.경쟁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다 보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잠시 잊을 때가 많다. 영화 속 주인공 혜원도 마찬가지였다. 뉴스를 보면 우리 같은 젊은 세대들의 암울한 미래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춘이 듣기에는 다소 힘 빠지는 이야기도 많다. 사회가 정한 성공의 틀에 짜 맞춘 삶을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그때까지의 세월과 성공으로 향하기 위한 열정과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영화 속 혜원은 그런 무의미한 시간을 벗어던진다. 비록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고향에 왔지만 스스로 살아있음을 몸소 체감한다. 이 영화가 전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시골 가서 밥 먹기만 해도 하루가 다 지나가네. 실제로 저렇게 사는 건 판타지야”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맞다. 이 영화는 실제 시골의 삶과 다른, 마치 현대 도시인이 만든 시골 판타지로 가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영화가 주

포스테키안의픽 | 조유현 기자 | 2025-12-03 11:05

‘그린 북’은 피터 패럴리 감독이 흑인 피아니스트와 백인 매니저의 실화를 각색한 영화다. 1960년대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을 배경으로,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백인 매니저 ‘토니 발레롱가’의 여정을 그린다. 영화 제목인 ‘그린 북’은 1936년 빅터 휴고 그린이 흑인 여행자를 위해 이용 가능한 장소를 정리해 발간한 실제 안내서로, 극중에서는 초반부에 토니가 건네받는 책으로 등장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 역으로 잘 알려진 배우 비고 모텐슨은 토니 역을 맡아 후덕해진 외모와 자연스러운 연기로 현실감 있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의 연기를 통해 관객은 셜리를 바라보는 토니의 시선을 따라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생생히 체험하게 된다.영화의 배경인 1962년은 인종차별이 숨 쉬듯 당연하다. 셜리는 차별의 벽을 넘고자 흑백 갈등이 심한 미 남부 투어를 계획하나, 현실은 차갑기만 하다. 어디를 가든 공연의 주인공임에도 매니저인 토니보다 무시당하기 일쑤다.작중 셜리 박사는 전혀 ‘흑인답지’ 못한 사람이다. 재즈 대신 클래식을 연주하고, 펍 대신 레스토랑에서 공연하지만, 백인에게는 피부색으로 외면당하고 흑인들과는 계층의 차이로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다. 이

포스테키안의픽 | 유영주 기자 | 2025-11-05 11:21

주인공 블로흐의 말처럼 경기장을 활보하는 공격수와 달리 골문을 지키고만 있는 골키퍼가 주목받는 일은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낱 관찰자인 우리가 과연 공이 골문 근처에 가기 전까지, 슈팅이 되기 전까지 감당해야 하는 골키퍼의 불안을 감히 짐작할 수 있으랴.‘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비단 축구 경기 속의 불안만을 담고 있지 않다. 한때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블로흐는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도중 현장감독의 눈빛 하나로 자신이 해고됐음을 지레짐작하고 일터를 떠난다. 동시에 그는 무형의 불안에 시달린다. 더 이상 사회와 상호작용을 하기 어려우며, 사회와의 교류 수단인 언어조차 낯설게 느껴진다. 저자 페터 한트게의 실험적인 서술 방식으로 이런 블로흐의 고립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어느 순간부터 블로흐는 ‘인간’보다는 사회 속의 ‘사물’이 돼간다. 감정적인 면도 보이지 않는다. 블로흐는 그저 톱니바퀴처럼 사회의 기계적인 구성 요소로 존재할 뿐이다. 그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블로흐의 언어는 서서히 붕괴하고, 마침내 사물과 언어의 경계를 잃어버린다. 불안에 잠식돼 버린 블로흐는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워 보인다.누구보다 공이라는 불안에 가

포스테키안의픽 | 김태린 기자 | 2025-09-02 21:44

지난 2023년,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이에 대응해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무차별 공습을 가하면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양측의 반복된 전쟁범죄와 보복을 바라보며,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떠올렸다.영화는 십자군 전쟁 시기의 세 명의 지도자를 조명한다.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4세 △예루살렘 왕국의 기사 발리앙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이다. 초반에 가톨릭 진영의 보두앵 4세와 이슬람 진영 살라딘의 모습을 각각 제시한 후, 보두앵 4세 사후 일어난 가톨릭 진영의 이슬람교도 상인 공격과 이에 대한 보복 전쟁을 보여준다.감독은 종교를 믿음으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믿음보다 선행과 관용을 중시한 주인공들을 보여주며 종교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시간을 제공한다. 종교적 성지보다 민간인의 안위를 우선한 발리앙의 모습을 제시해 평화적 공존의 중요성과 진정한 종교의 가치를 역설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와 동시에 세련된 영상미와 훌륭한 미장센 또한 놓치지 않는다. 볼 때는 재밌게 즐기다가도, 관람 후에는 종교와 평화에 대해 자연스레 성찰하게 된다.감

포스테키안의픽 | 최진현 기자 | 2025-05-28 15:54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밤하늘의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기숙사 옥상에서, ‘우리 사이 은하수를 만들어’라는 음악이 처음 흘러나오던 날을 잊지 못한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는 그렇게 듣게 된 몽글몽글한 OST에 한 번, 섬세한 영상미에 두 번 반해 보게 된 작품이다. 우연히 접한 이 작품은 떠올릴 때마다 늘 미소 짓게 되는 ‘인생 드라마’로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았다.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배타미, 차현, 송가경 세 명의 당당하고 능력 넘치는 커리어우먼과 ‘포털사이트 시장’이란 신선한 배경이다. 오늘날, ‘검색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다. 이 작품은 극 중 여러 에피소드로 시청자들에게 정보화 사회의 이면을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작품 속에 러브라인이 등장하나, 단순하고 뻔한 로맨스물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또 다른 매력 포인트다. 드라마 속엔 의리, 경력 등 풋풋한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들이 속속 등장하고, 그 가치들은 세 주인공이 모두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할 수 있는 열정의 원동력이 된다. 난 계약이 엎어져도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예요. 난 모르거든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래서 하고 싶은

포스테키안의픽 | 양지윤 기자 | 2025-03-26 18:19

‘시라노’는 프랑스의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제작한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작중 주인공인 ‘시라노’는 큰 코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만 빼어난 글솜씨와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춘 인물로, 가스콘 용병대의 대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귀족 여인 ‘록산’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외모 때문에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 그때 ‘크리스티앙’이라는 신입이 가스콘 용병대로 합류하며 뮤지컬은 △시라노 △록산 △크리스티앙 사이의 삼각관계, 그리고 전쟁에 임하는 가스콘 용병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흘러간다. 시라노에는 매력적인 삽입곡이 많이 존재한다. 귀족의 병사들과 싸우기 전 시라노가 부르는 ‘거인을 데려와’,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안녕 내 사랑’, 가스콘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가스콘 용병대’ 등 다양한 분위기를 가진 삽입곡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더불어 전반적으로는 △극 중간중간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대사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노래 △감동을 주는 결말까지 세 박자가 잘 어우러지며 누구나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지난 23일 예술의 전당에서 약 3개월간 펼쳐졌던

포스테키안의픽 | 이주형 기자 | 2025-02-26 20:46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책의 제목 '숨결이 바람 될 때'는 부르크풀크 그레빌 남작의 소네트에서 따온 구절로, 삶과 죽음이 서로 이어져 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이 책의 저자 폴 칼라니티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죽음과 질병을 이해시키는 따뜻한 신경외과 의사였다. 그는 레지던트 과정을 막 마치고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으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순간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어딘가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문장은 한계가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마치 점근선처럼 목표를 향해 끝없이 다가가려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석 달이라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1년이라면 책을 쓰고, 10년이라면 환자를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다짐은 그의 삶의 지침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이 모든 목표를 이뤄냈다.저자는 의사이자 환자로서 자신의 투병 과정을 담담하고도 진솔하게 풀어낸다. 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어딘가 먹먹한 기분은 아마도 그가 너무나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책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채

포스테키안의픽 | 정혜정 기자 | 2025-01-06 09:00

인터스텔라가 개봉 10주년을 맞았다. 쿠 퍼와 브랜드 박사가 애타게 데이터를 찾던 밀러의 행성에서는 1시간 26분쯤 지났을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완벽에 가까운 과학 적 고증과 뛰어난 컴퓨터 그래픽으로, 관객 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황폐해진 지 구를 떠나 인류의 새 보금자리를 찾는 여 정은 우주를 갈망하는 공학도의 가슴을 두 근거리게 만든다. 필자는 처음 인터스텔라를 본 날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물리학 과정을 선행 학습 하던 중 인터스텔라를 처음 접했다. 상대성 이론에 따라 중력이 다른 공간에서는 시간 의 흐름도 다르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날 밤 상대성이론에 관한 유튜브 영상과 책을 마구 찾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필자 는 매년 크리스마스 저녁이면 거실의 불을 끄고 혼자 인터스텔라를 본다. 광활한 우주 여정에 새겨진 복잡한 식과 이론을 통해 스스로 지식의 성장과 한계를 확인한다. 인터스텔라의 또 다른 묘미는 바로 ‘음 악’이다. 밀러의 행성에서 1.25초마다 들리 는 시계 소리는 지구에서 하루의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한다. 만 박사가 불완전 도킹 을 시도하다가 일으킨 폭발 장면에서는 배 경 음악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 지 않는다. 우주에

포스테키안의픽 | 김윤철 기자 | 2024-11-27 14:33

하얀 운동화, 텅 빈 무대, 그리고 한 남 자의 기타. ‘Psycho Killer’의 첫 음이 울리 는 순간, 이것이 그저 평범한 콘서트 필름 이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Stop Making Sense’는 1984년 공개된 이후 지금까지도 ‘최고의 콘서트 영화’로 불리는 작품이다. 무대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끊임 없이 변화한다. 처음엔 데이비드 번 혼자 서있던 무대가 곡이 진행될수록 악기와 밴 드 구성원들로 하나둘 채워지고, 관객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무대의 일 부가 된다. 인터뷰도, 내레이션도 없다. 오 직 존재하는 것은 밴드의 에너지 넘치는 퍼포먼스뿐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공연이 단순한 라 이브 연주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토킹 헤즈 는 자신들의 히트곡들을 완전히 새로운 방 식으로 재해석한다. 우스꽝스러울 만큼 커 다란 양복을 입고 나타난 데이비드 번의 모습부터 멤버들의 즉흥적 움직임, 그 움직 임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그림자놀이와 같 은 조명 연출까지. 이 모든 것이 새롭게 편 곡된 노래들과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실 험적인 연극을 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88분이라는 시간 동안, 토킹 헤즈는 무대 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포스테키안의픽 | 이재현 기자 | 2024-10-30 13:00

난 아이언맨이 못마땅하다. 군수업자 재벌이 자경단 노릇을 하고 다니는데, 시민들은 아무 불만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한 번이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봤다면 이 드라마가 마음에 들 것이다. ‘더 보이즈’는 짧게 말하면, 히어로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의 복수극이다. 메인 플롯은 고전적이지만, 서브 플롯의 메시지는 어떤 사회고발물보다 깊다. 초능력자가 존재하는 공상과학 세계지만 우리의 삶과 소름 끼치게 닮아있다. 이 드라마에서 제일 재밌는 설정은 ‘보우트(Vought)’사다. 보우트는 일종의 슈퍼 히어로 소속사로, 슈퍼히어로들의 활동을 관리 및 홍보하고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대기업이다. ‘바디 포지티브’라며 여성 히어로에게 노출을 강요하는 장면은 현실의 영화 제작사가 생각나 쓴웃음을 짓게 된다. 사고를 앞세워 군대가 히어로와 계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히어로가 “나는 우월하다”라며 막말을 뱉으면 대중들은 솔직하다며 열광한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 은 장면 아닌가? 그래서 주인공들은 결국 슈퍼히어로가 아닌 대기업에 맞서게 된다. 빠른 전개와 깔끔한 선악 구분을 좋아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점점 커지기만 하고, 주인공들은 지긋지긋하게 안 뭉친다. 하

포스테키안의픽 | 김수진 기자 | 2024-09-06 19:24

우리는 타인과 매 순간 마주하며 살아간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까운 타인에 대해선 전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수 년, 수십 년 동안 친분을 유지한 사람에게 도 낯선 면모가 존재한다. ‘가장 가까운 타 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자신도 마찬가 지다. 이 작품은 내면이 성장함에 따라 다 른 이가 보여주지 않던, 내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주인공 소유는 일본인 교환학생 쇼코와 인연을 맺는다. 대학을 졸업한 뒤 영화감독 을 희망하던 소유는 실패를 겪고 가까운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고립된다. 서른에 이 르기까지 그러한 생활을 지속하다 할아버 지를 간병하는 두 달가량의 시간 동안, 소 유는 그동안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맞이한 후, 소유는 다시 만난 쇼코와 지난날 소유의 할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로 늘 무뚝뚝하 던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접한다. 한편 쇼코 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주는 지나친 사랑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한다. 하 지만 그녀는 도쿄의 대학에 합격하고도 고 향을 떠나지 못한다. 책의 중반부에 들어 쇼코의 나약하고 불안정한 모습은 그녀가 오히려 그런 할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있었 다

포스테키안의픽 | 이이수 기자 | 2024-06-12 16:16

우리는 일평생 얼마나 많은 마음을 상상 하고 읽어내게 될까. 가까운 대인관계부터 복잡한 사회생활까지 나를 둘러싼 인생의 미션을 완수하는 데는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 두 가지를 모두 이루려면 자신과 타인의 ‘마음 읽기’가 원활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불투명하고 시시각각 바뀌는 성질을 가져서, 뚜렷한 속을 콕 집어내기가 어렵다. 책 ‘나주에 대하여’는 뾰족한 구석과 예민한 영역, 불안정한 순간으로부터 나오는 못생긴 마음들을 솔직하게 쓴 단편집이다. △질투 △부러움 △열등감 △합리화 △비굴함처럼 누구나 가져봤던 못생긴 마음, 앞으로 가지게 될지도 모를 단편적인 마음이 담겼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부끄럽고 못생긴 내 마음을 읽어내 시원하게 하는 힘이 있다. 단편 ‘꿈과 요리’에는 대학 시절 멀리, 또 가까이서 서로를 바라보던 수언과 솔지가 등장한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을 매개로 미묘한 신경전을 잇던 두 친구는 ‘쟤가 보기에 나는 어떨까?’라는 생각에 얽매여 있었다. 서로에 대한 부러움은 너를 무시하고 싶다는 심술과 맞닿아 있어서, 수언과 솔지는 각기 다른 이유로 진짜 마음을 숨긴다. 누구보다도 능동적으로 영화를 사랑했던 솔지는 졸업 후 은행원이 되며 꿈보다 현

포스테키안의픽 | 손유민 기자 | 2024-05-22 16:01

지난 1월, 쓸쓸한 바람이 부는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를 걸었다. 조용히 색이 바랜 나무들 사이로 활개를 치며 뛰어다니는 강아지들, 놀이터에서 모여 노는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르게 된다. 그저 발 도장에 그치지 않고 마음에 아로새기는 의미를 붙잡기 위해 나는 방문 전 이 책을 읽었다.저자는 세상을 버틸 힘을 잃었을 때 그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이곳의 경비원이 돼 미술관을 지켜왔다. 그는 10년간 많은 미술품을 바라봐 온 방식과 그로부터 힘을 얻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15세기 작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대해 그는 오랜 시간을 견뎌온 그 단단하고도 거친 나무판 위로 템페라가 입혀진 모습, 그리고 시간에 잘게 갈라진 금박 아래로 엿보이는 붉은 진흙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한 작품을 정말 오래 봐야만 알 수 있는 사소한 모습과 선명히 느낀 슬픔까지, 그의 진실한 감상이 부러웠다. 나는 반나절 동안 도장 깨기를 하듯 둘러봐야 하는 여행객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긴 시간과 관찰로부터의 감상을 공유받을 수 있음에 안도를 느끼기도 했다.나는 짧은 시간 동안 영유하듯 빠르게 그림들을 훑다가도, 인상적인 그림 앞에서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서

포스테키안의픽 | 강민영 기자 | 2024-03-22 18:42

이 영화는 크리스 워싱턴이라는 한 흑인 남성이 여자친구의 가족인 아미티지 집안에 초대받아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영화는 극의 초중반 내내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초대된 후에도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며, 주인공과 관객들의 긴장 수위를 높인다. 이는 극의 말미에 가서야 해결된다. 다시 말하자면 극의 초중반은 서스펜스로 관객들의 긴장 수위를 조절하고, 극의 후반은 클리셰로 느껴질 수 있는 스릴러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참신하다. 기존의 사회 문제와 관습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점은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다. 감독은 새로운 소재를 영화에 사용하기 위해 극이 진행되는 동안 영화의 설정을 정당화한다. 이는 점차 쌓이다가 숨겨진 전말이 드러날 때 그 효과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이 영화는 미국 작가 조합이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각본’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제치고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영화를 다시 볼수록 숨겨진 부분이 눈에 보이며 완성도가 매우 높은 영화임을 느낄 수 있다. 여러 번 반복 관람을 하면 보이지 않던 미장센이 보이며 감독이 전하는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인이라서

포스테키안의픽 | 이재현 기자 | 2024-02-29 20:06

모든 사람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중간에 갈림길을 만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지언정 뒤로 걸어갈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추억하기도 한다. 만약 그 길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여기 다시 돌아가는 것을 저주처럼 느꼈을 한 여자가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여자를 중심으로 사건은 흘러간다. 초능력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사이에서 죽을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몇십 번, 몇백 번이고 시간을 되돌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의 이야기 끝에는 그 사람의 죽음이라는 결말만이 존재한다. “이쯤 되니 내가 하는 짓이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도돌이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을 위한 연주처럼 느껴져”라고 말할 만큼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못한다. 작가는 결말을 알면서도 돌아가는 그녀의 비참한 심정을 대사로 처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는 모두가 살 수 있는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문목하 작가의 데뷔작인 ‘돌이킬 수 있는’은 초능력물과 첩보물을 겸비한 장편소설이다. 책에서는 주인공의 능력을 초반에 밝히지 않고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독자가 자연스레 알아 가도록 이

포스테키안의픽 | 이주형 기자 | 2024-01-01 20:03

삶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누군가에게 삶은 행복의 절정이고, 누군가에게는 행복해지려 애를 써야 하는 부담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마땅히 지탱해야 할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모순 속에서 주인공 안진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결단코 ‘나’를 장악하며 한 생애를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고.부유하지만 평온함이 무덤 속과 같다는 이모와 쌍둥이지만 정반대로 팍팍한 시련에 강해지는 엄마를 보며, 안진진은 모순이 빚어내는 불편한 상황들을 대면한다. 그러나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 그 불편 덕분이라는 걸 깨닫고서 제 살길로 향해가겠다고 다짐한다. 남들이 보기에 술주정과 가출을 일삼는 무책임한 아버지는 한편으로, 생각하는 행위가 사람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뿐 아니라 그 용량을 초과하면 곤란해진다는 교훈을 남긴다. 그녀의 삶은 누가 봐도 평탄하지 않았다. 쌍둥이인 이모와 엄마의 모순된 운명을 떠올리자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세상을 원망하기 쉬웠다. 그런 안진진에게 가장 큰 힘은 모순된 세상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한편 무조건 옳지 못한 존재란 없다고 자신을 북돋우는 긍정이었을 테다.책 ‘모순’은 1980년대 여름, 시끌벅적한 세상에 용기를 잃은

포스테키안의픽 | 손유민 기자 | 2023-12-05 2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