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리에 방영됐던 미국의 시트콤 ‘빅뱅 이론’에서는 이론물리학자 쉘든과 신경생물학자 에이미의 만남이 그려진다. 둘의 유별난 성격에서 오는 소통의 어려움, 상대 학문에 대한 경시로 인해 좌충우돌하는 에피소드들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의외로 과학적 엄밀함에 있어서는 두 사람의 합이 잘 맞는 데가 있다. 필자와 같은 생물물리학자에게는 이 얼마나 반가운 모티브인가!
생물물리학은 물리적인 기술로 생명 현상을 연구하고, 이로써 그 뒤에 숨어 있는 물리적 원리를 밝히는 분야다. 중·고등학생 때 생물이 암기 과목이라 싫고, 물리의 수식이 어려워 싫어했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학문이 말만 들어도 고역일 것이다. 하지만 생명 현상의 경이로운 가능성에 감탄하고, 물리적 원리의 간결함에 매료됐던 학생들에게는 이보다 더 매혹적인 학문도 없을 것이다. 생명의 신비는 복잡성에 있다. 생체 물질 몇 종류의 조합만으로는 세포의 역동성을 설명할 수 없고, 더욱이 인간처럼 나름 창의적이고 고등한 개체의 발생은 영겁의 세월을 통한 무작위적 시행착오와 자연선택으로 설명한다. 반면 물리학자의 ‘추구미’는 단순함이다. 하나의 수식을 통해 세상을 기술하고자 하고, 물리 법칙은 예외를 허용치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생물학과 물리학의 접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신경전달물질 방출을 관장하는 스네어 복합체
한 예로 신경세포에 있는 스네어 복합체(SNARE Complex)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자. 이 단백질 복합체는 시냅스에서 엔도르핀이나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전달을 촉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면, 시냅스 소포(Synaptic Vesicle) 표면의 지질막과 신경세포의 지질막에 나뉘어 있던 스네어 단백질이 만나 뭉치는 과정에서 두 개의 지질막이 융합된다. 이를 통해 소포에 담겨 있던 신경전달물질이 세포 밖으로 방출되면 그다음 세포에 도달하는 식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생물학이나 생화학적 접근은 세포의 구조 및 조성을 파악하거나 샘플 용액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집합체의 화학적 성질을 분석하는 식이기 때문에, 스네어와 같은 단백질이 개별 분자 수준에서 어떻게 움직여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는지 알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바로 여기에서 생물물리학의 방법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가령 스네어 복합체의 양 끝을 잡고 당긴다고 상상해 보자. 아미노산의 기다란 사슬로 이뤄진 단백질 분자는 보통 복잡한 3차원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양 끝에 힘을 주어 당기면 내부 결합이 조금씩 뜯어지면서 풀어지기 마련이다. 마치 한 줄의 양면테이프 부분 부분을 뭉쳐 덩어리로 만들었다가, 양 끝을 다시 잡아 뜯을 때 나타나는 점진적인 변화와 같다. 그런데 이 뜯어지는 패턴이 내부 구조에 의해 좌우된다는 원리를 역으로 적용해 보자. 단백질이 뜯어지는 과정을 정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단백질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구조와 역학적인 특성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스네어의 경우와 같이 여러 단백질 분자의 조립이 주된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는 강한 힘으로 단백질을 풀어낸 뒤, 다시 힘을 풀어 조립하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복합체의 역학적 안정성과 구조 변화가 중요한 물리적 변수로, 바꿔 말하면 얼마만큼의 힘이 가해졌을 때 단백질 구조가 얼마만큼 변하는지 관찰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자기집게를 이용한 스네어 복합체 역학 연구
스네어 복합체의 예로 설명한 이 실험은 단분자 힘 분석법(Single-Molecule Force Spectroscopy)이라 불리는 연구 기술이다. 본래 스펙트로스코피(Spectroscopy)라는 단어는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하는 분광학을 의미하기 때문에, ‘힘 분광법’으로 직역하면 언뜻 어색하게 들리지만, 생체 분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넓은 대역에 걸쳐 조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리 잘못된 표현도 아니다. ‘단분자’라는 수식어는 단백질과 같은 생체 분자 하나하나를 직접 조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추가됐다. 물론 단분자 수준 분석의 성패는 (1) 아주 작은 생체 고분자에, (2) 아주 작지만 정확한 힘을 가해, (3) 이에 따른 구조 변화를 아주 높은 정밀도로 측정하는 데 달려있다. 이를 위해 필자의 연구실에서는 자기 집게(Magnetic Tweezers)라는 기술을 이용한다. 먼저 스네어 복합체의 한쪽 끝을 슬라이드 글라스 표면에 고정하고, 다른 한 끝은 자성입자(미세먼지 크기의 철가루로 볼 수 있다)에 부착시킨 뒤, 강한 자석을 적당한 위치에 두고 움직여 입자에 전달되는 힘을 조절함으로써 단백질에 힘을 가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단백질의 구조 변화 역시 자성입자의 움직임을 추적해 알아낼 수 있으니, 입자 하나로 문자 그대로 일석이조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최근 발표한 영상 논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High-Speed Magnetic Tweezers for Nanomechanical Measurements on Force-Sensitive Elements
이런 생물물리학 실험을 통해 연구자들이 알아낸 스네어 복합체의 움직임은 가히 역동적이면서도 치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 속 톱니바퀴를 연상케 한다. 실타래 같은 단백질 가닥이 한쪽 끝에서부터 정렬돼 순차적으로 새끼줄처럼 꼬이는데, 이때 세포 안의 작은 세상치고는 제법 강한 수준인 십수 피코뉴턴(piconewton, N)의 힘을 만들어낸다. 바로 이 물리적인 힘이 시냅스 소포와 세포막을 서로에게 끌어당겨 터뜨려 버리는 것이다. 물론 스네어의 초정밀 톱니바퀴는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정교한 부품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단 30나노미터(nanometer, m)라는 짧은 변화 과정에서 섬세한 중간체를 단계적으로 거치며 모든 임무를 완수하는 이 시스템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마치 인공위성에서 우리의 걸음걸이를 내려다보는 수준에 불과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미세함이다. 일상의 감각과 인지, 운동을 가능케 하는 모든 신경신호 전달의 근간이 이 조그만 단백질 복합체의 역학적 움직임에 있다니, 새삼 손가락 끝의 작은 움직임에도 주의를 기울여보게 된다.
포스텍과 생물물리
포항은 한국 생물물리학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우리대학의 생물물리 연구진은 명실상부 국내 최강의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고, 이곳 출신 졸업생들은 국내외 주요 연구기관으로 진출해 활약하고 있다. 지금도 대학원생들은 매년 권위 있는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며 연구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으며, 여름마다 전국 각지의 학부생들은 우리대학에서 열리는 ‘생명물리 여름학교’에 모여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기초과학을 중시해 온 학교의 전통과 활발한 학제 간 교류의 문화를 생각하면 이런 족적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생물물리학은 지난 수십 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한 신흥 학문이고, 근래에는 전자현미경이나 알파폴드와 같은 구조 분석 기술의 혁신과 함께 또다시 새로운 도약을 목전에 두고 있다. 포항의 차세대 생물물리학자들은 또 어떤 근사한 연구로 그 한 페이지를 장식할지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