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와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
민주주의 위기와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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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5.02.26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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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에 따른 탄핵 재판이 진행되는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기만 하다.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 모두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치고 있지만,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작 한국의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는 국내외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갈등의 조정과 타협, 양보와 합의를 통한 다양한 세력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적 목표의 달성은 커녕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상대편을 제거하고자 하는 극단적 대결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러한 민주주의의 퇴행은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니다. 정치학 연구에서 각국의 정치체제 분류에 널리 사용되는 권위 있는 지표인 POLITY 점수에 따르면, 지난 1월 발표된 자료에서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 국가로 이행하고 있는 국가로 분류되었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받아들여졌던 한국과 미국 모두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국내외 많은 정치학자는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유지되고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민주적 규범 준수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헌법을 비롯한 각종 법령으로 규정된 공식적인 절차와 제도는 빠르게 변하는 사회적 조건과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완벽히 포괄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불완전성과 모호성을 지니게 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민주적 규범은 이러한 공식적 절차 및 제도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비공식적 제도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하버드대학교 정치학과의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는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라는 규범을 민주주의 유지에 필수적인 민주적 규범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제도적 자제란 자신의 당파적 이익을 얻기 위해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고자 할 때 동원할 수 있는 합법적인 절차와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회는 합법적으로 정부 주요 인사를 탄핵할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파적 이해관계의 달성을 위해 이 제도를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통령 역시 법률재의요구권이라는 합법적인 제도를 통해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을 거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매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 사태를 맞이한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우리나라 정치에서 제도적 자제라는 민주적 규범은 이미 사라졌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무엇이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토록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유권자들 사이에서 제도적 자제라는 규범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정치인들은 쉽사리 이 규범을 위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규범 위반 시 선거에서 유권자들에 의해 낙선이라는 처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권자들이 이러한 규범 준수를 포기하는 순간 정치인들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고 제거하는 헌법적 강경태도(Constitutional Hardball)의 빗장이 열린다. 유권자들의 민주적 규범 준수 포기는 정치적 반대파를 공존해야 하는 정당한 경쟁자보다는 제거해야 할 악(惡)으로 바라볼 때 시작한다. 즉, 유권자들 사이에서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이 사라지면 민주주의는 위기와 퇴행이라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유권자들의 상호 관용 침식을 일으키는 다양한 요인 중 소셜미디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등장 초기에는 자유로운 공론장이 될 것이라 기대되었던 소셜미디어가 이제는 정치적 반대파를 악마화하는 가짜뉴스 범람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그리고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서 설계된 추천 알고리즘은 반향실 효과(Echo Chamber)를 일으키며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소셜미디어와 알고리즘을 개발했던 엔지니어들이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지금의 현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자신이 연구하고 개발한 기술이 우리 사회에 어떠한 파급력을 미칠 것인지 고민하는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