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는 누군가와 아무리 가까워져도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중학교 때 알았던 그 모습에서 많이 바뀌어져 있었다. 그때는 철없는 장난꾸러기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지금은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대화 주제도 정말 많이 달라져서 같은 사람이 맞는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 연락을 이어가며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많이 나눴다.
음악을 전공하는 친구는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며 남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친구가 겪은 크고 작은 사건을 알게 되니 변화의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나로서는 친구가 겪은 사건의 무게와 그 순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랬겠거니 하는 추측에 기반한 불완전한 공감과 위로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상대방의 인생을 모두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어떤 상황에서 그들이 느낄 감정과 생각을 완벽히 이해하고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느꼈다. 처음 이것을 깨달았을 때, 조금 외롭다고 느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있다. 친구, 가족, 혹은 연인들은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위로를 전하기도, 선물을 준비하기도, 안부를 묻기도 한다. 비록 이런 행동의 결과가 예상과 완벽히 같지는 않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위로에 힘을 얻고, 선물에 기뻐하고, 안부에 반가워한다. 완벽한 이해를 기반하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 나의 행동은 대부분 의도한 대로 타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며, 타인도 내게 그러한 영향을 준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절대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들을 더 알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의미 있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은 결국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확신이 없기에 서로를 위한 행동의 결과와 상대방의 감정을 고민한다. 예를 들어 내가 친구를 위로하고자 할 때, 그에게 어떤 말이 가장 힘이 될지 고민하곤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그에게 위로가 될 말을 끝없이 물색하고, 그가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감정을 느낄지 고민한다. 이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불완전한 이해(理解)관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쁜 일상에서 자신의 시간을 짧게나마 온전히 상대방을 위해 쓴다는 사실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결론적으로, 난 서로를 불완전하게 이해하는 내 인간관계가 좋다. 나를 위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는 대학교 동기와 선후배들도, 비록 다른 세상에 살지만 서로를 응원하는 친구도,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내 가족들이 너무 좋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오늘도 조금이나마 더 그들을 알아가고, 이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