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말이 너무 많다’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12·3 계엄 사태 이후 도저히 같은 주제로 글을 쓸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말이 너무 없다.
지난 12월 14일 토요일, 윤석열의 탄핵소추안 표결이 이뤄졌다. 전국에서 집회가 열렸고 시민들은 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구호를 외치며 개표를 기다렸다. 아이돌 팬은 소중한 응원봉을 들고, 건설 노동자는 소중한 헤드랜턴을 끼고 거리로 나왔다. 나는 기자로서 12월 9일 자 한겨레 신문 1면을 피켓에 붙여 손에 들었다. 그곳에는 12월 7일 탄핵소추안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 의원 105명의 사진과 이름이 있었다.
이 105명을 규탄하는 이유는 단순히 탄핵에 반대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사결정의 기본인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정치인이라면, 반대표를 내더라도 투표는 해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본회의장을 나간 105명은 분명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두가 그들의 입장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침묵은 결코 중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침묵이 중립이 아니라는 말은 정치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폭력예방교육을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방관은 가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범죄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방관, 방조다. 중립을 지킨다는 생각은 허상이다. 애초에 기울어진 땅에서는 가만히 서 있어도 한쪽으로 굴러떨어지기 마련이다. 왜 독재자들이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출판을 통제하겠는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만큼 좋은 동조자가 없기 때문이다.
당장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함께하자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눈을 감고 귀를 막지 말자는 것이다.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도 침묵할 것을 요구하지도 말아달라. 역사의 모든 진보는 논쟁에서 출발하고 모든 논쟁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어떤 변화도 성장도 없는 사회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문제를 외면해선 안 된다.
대한민국 헌법의 첫 두 조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권력이다. 한 나라의 권력을 책임진 우리는 마땅히 목소리를 낼 권리와 책임이 있다. 우리에겐 침묵할 의무가 없고, 오히려 침묵하면 안 될 이유만이 있다.
물론 전부 개인이나 우리학교의 문제라는 건 아니다. 논란을 피하고자 시스템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을 모두 지워버린 교과서와, 사회 문제에 대해 스스로 깊이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 공교육이 안타깝다. 그 때문인지 계엄은 2시간 만에 해제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엄 상황인 것처럼,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말이 나오면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이 있어 이 글을 적는다.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를 인용하며 마친다.
“우리는 달려야 해 / 바보 놈이 될 순 없어 / 말 달리자 (중략)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달리는 것뿐이다 / 무얼 더 바라랴 / 어이 이봐 거기 숨어있는 친구 이리 나오라고 / 우리는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