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다, 실패해도 럭키비키잖아’
외면하고 싶은 순간조차 긍정적으로 사고하자는 뜻의 말이다. 평소에는 나도 웃으며 럭키비키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 우연히 이 말을 들으니, 할 수 없는 걸 왜 자꾸 하겠다는 건지, 실패가 어떻게 럭키라는 건지, 싶더라.
문득 고등학교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던 ‘피로사회’라는 책이 떠올랐다. 책은 21세기 현대사회가 과거 ‘~하면 안 된다’가 대전제였던 규율사회에서 벗어나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가 만연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고 주장한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과 긍정성이 사회 곳곳에 만연했던 수직적 구조와 지배적 규율로부터 우리 사회를 더욱 자유롭게 하며 개인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기회와 자유의 바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점점 피로해지는 동시에 OECD 자살률 1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도한 긍정이 초래한 강박과 탈진 때문이라고 한다. 주어진 자유의 총량은 증가했지만,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말은 오히려 부담으로 돌아와 자기 착취를 불러온다. 자신의 한계를 악착같이 이겨내고 생산적인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마음은 점점 병들게 되는 것이다.
스물이 된 올 한 해, 나 또한 기회와 자유의 바다에 뛰어들어 아홉 달을 보냈다. 올 초 나는 그런 바닷속에서 스물이라는 큰 문을 열기 전까지 꾹꾹 눌러 담았던 마음을 양껏 펼치고 싶었다. 하지만 여유가 주어진다고 해서 그 여유를 온전히 즐기는 것도 참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를 워커홀릭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늘어 가는 것 같다. 일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휴일마저도 주어진 여유를 온전히 즐기기보다는 끝없이 자신의 한계와 미래에 대한 사색에 빠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너무 먼 미래와, 굳이 이겨내려 애쓰지 않아도 될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서두르고 흔들리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행복을 놓치고 만다.
가끔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서두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온전히 내 마음에만 귀 기울여 진짜 내 모습을 어루만져주는 건 어떨까. 매 순간 스스로를 긍정의 틀 안에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쓸 필요는 없다.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의 총량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할 수 있다는 말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지금 당장 우울하고 불안하다고 해서 먼 훗날의 내가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실패해도, 좌절해도 오늘은 흘러가고, 나는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