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용서
전쟁과 용서
  • 조원준 기자
  • 승인 2024.06.1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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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앉아 넓은 통유리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르고 광활한 하늘과 따스한 햇살 아래 반짝거리면서 살랑이고 있는 언덕 위의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갑작스레 울적해졌다. 이 감정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시끌벅적한 카페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움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최근에 읽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에서 묘사된 전쟁의 참혹함을 보았기 때문일까.

지구 반대쪽에선 두 개의 큰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곳 사람들에겐 저 푸른 하늘이 미사일이 떨어지는 천장으로 보일 거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에 나가면 시끌벅적한 일상적인 장면보다는 사람들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들을 두려워하며 뛰어다닐 거고, 모든 건물의 문은 닫혀 있을 것이며, 약탈과 쟁취가 넘쳐나는 원시적인 공간일 거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못한 채 걸으면서 잠을 보충하고,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는 끔찍하고 잔인한 광경들 속에서 오로지 생존만을 목표로 버티고 있으리라. 간호사, 의사들은 쉬지 않고 들어오는 환자들과 그 환자들이 누워있던 침대가 빠르게 갈아치워지는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우울감과 공포감에 휩싸였다가 나중에 무감각해지지 않을까.

누군가는 말 한마디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지만, 나는 지구촌의 한 일원으로서 이 참혹함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무력하고 슬프게 만든다. 깊은 역사와 원한, 복잡한 국제정치적 관계로부터 끓어오른 한 나라의 일을 어찌 타국의 일개 개인이 억제하겠는가.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가자지구 전쟁 반대 시위는 전쟁의 중단 여부에 조금씩 도움이 돼가는 것을 보며 희망을 느낀다. 한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해서는 이러한 시위나 운동을 찾아볼 수 없는 점이 안타깝고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전쟁은 △인종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 글로 사람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알릴 수 있다면, 나 또한 시위하는 사람들처럼 전쟁의 중단에 기여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의 참혹함은 전쟁 중보다도 전쟁이 끝난 후에 더 크게 다가올 것 같다. 민간인들은 잃어버린 가족과 지인에 대한 기억 속에서, 군인들은 피와 시체로 가득한 지난날 속에서, 간호사나 의사들은 자신의 곁에서 사라진 수많은 망령들 속에서 살아가며 또 다른 끊이지 않는 전쟁의 길을 걸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6·25 전쟁 △제1·2 차 세계 대전의 잔재인 군인들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잃어버린 가족들에 대한 기억 등은 아직도 고통 속에 남아있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노찬성과 에반’에서 어린아이 에반은 할머니에게 “할머니, 용서가 뭐야?”라고 묻는다. 할머니는 담담히 “그냥 한 번 봐달라는 거야”라고 답한다. 유일한 탈출구인 용서조차도 피해자가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들을 스스로 고치는, 생각보다 굉장히 잔인하고 슬픈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용서라는 말의 무게가 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요즘, 그들에게 용서라는 단어는 얼마나 무거울까. 그러나 그들이 모든 것을 잊고 나아갈 방법은 단 하나, ‘용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의 인생과 끊임없이 바위를 산에서 굴리는 시시포스의 형벌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전쟁이 시작된 순간, 개인의 삶은 △성별 △인종 △나이와 관계없이 전쟁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들의 삶에서 전쟁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란 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들 모두에게 저 아름다운 하늘과 나무가, 시끌벅적한 카페가 만드는 평화가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