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고도의 과학화기술화전문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적 전문지식은 공적 의사결정에서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중요한 공적 의사결정을 오로지 과학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하는가?
과학기술적 전문지식을 탐구하는 행위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행위이지만, 사회의 공적 의사결정은 정치적 행위이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의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순간 전문가들의 의사결정은 과학적 논리만이 아니라 정치적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적 논리의 핵심은 민주주의이다. 전문가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대립과 긴장의 관계에 놓여있다. 전문가들에 의한 공적 의사결정을 주장하는 전문가주의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적 의사결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동등한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인해 비과학적인 ‘잘못된’ 결정이 내려져 공동체에 해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중우정치’라는 이름으로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제기되어온 민주주의의 약점이다. 자기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가 민주적 방식으로 억울하게 처형되는 것을 목격한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주장했다. 정의롭고 자애로우며 지혜를 가진 철인(Philosopher)이 공동체를 이끌 때 공동체는 진리에 가까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 시대 지식의 담지자가 철인이었다면, 오늘날은 과학기술 전문가가 그 역할을 어느 정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전문가들에게 공적 의사결정을 내리게 하는 전문가주의가 낫지 않은가?
하지만, 전문가주의는 ‘지식’이라는 요소를 보장할지는 몰라도, ‘정의롭고 자애로운’ 전문가를 보장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전문성이라는 권위를 바탕으로 사회적 자원을 배분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정치적 권력이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는 경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정보 비대칭이 전문가들에게 정보 권력을 부여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이 천사와 같이 이타적이고 정의롭고 자애롭다는 조건이 성립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전문가들이 정보 권력을 이용하여 겉으로는 공공의 이익을 표명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것이라는 의심은 합리적이다.
문제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면 설령 전문가들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내린 의사결정일지라도 사회적인 권위와 신뢰를 확보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와 신뢰의 상실은 전문성에 기반한 ‘옳은’ 결정의 정치적 정당성을 약화해 의사결정에 대한 반발과 저항을 초래할 수 있다. 심지어 전문성과 거리가 먼 당파성과 같은 비과학적 요소를 공적인 의사결정에서 더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으며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전문성이 구축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전문가주의는 여전히 공적 의사결정 방식으로서의 취약성을 노출하고 있다. 인간은 물질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민주주의가 오늘날 우리 정치의 기본 논리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의사결정 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가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광범위한 동의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설령 ‘올바른’ 결정일지라도 의사결정 과정에의 참여가 배제된다면 사회 구성원들은 이 결정을 정당한 것으로 바라보지 않게 돼 저항과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
과학기술적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올바르고’ 동시에 ‘민주적’인, 그래서 사회에서 잘 수용될 수 있는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전문성과 민주성 사이의 존재하는 근본적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는 ‘정답’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창의력을 바탕으로 지속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왔으며 찾고 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관찰과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포스테키안들이 전문성과 민주성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창의적인 해답을 찾아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