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간 세계 패권을 두고 벌이는 경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이후 국제 체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갔지만,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무역에서 각국이 결제 대금으로 미국의 달러화 대신 중국의 위안화를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달러화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코로나19 사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금융시장이 흔들리며 혼란이 가중된 상태로 미국과 중국 사이 힘겨루기가 본격화되며 ‘달러 패권’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기축통화는 무역과 금융에서 결제에 사용되는 화폐를 말한다. 지금껏 영국의 파운드화를 비롯해 여러 강대국의 통화가 기축통화로 사용됐지만, 현재 가장 영향력이 큰 기축통화는 미국의 달러화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주요 연합국의 대표들이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데 합의하며 미국의 달러화는 범용적인 기축통화의 지위를 확립했다. 이후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1970년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결제 대금을 달러로만 하는 대신 미국의 안보력을 제공하는 것을 대가로 협정을 맺어 일명 ‘페트로 달러’ 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미국의 셰일 가스와 친환경에너지 정책으로 페트로 달러 체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미국은 최대 석유 소비국이자 중동 국가로부터 석유를 수입하는 고객이었지만, 셰일 가스를 통해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하자 중동 국가들은 미국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의 셰일 가스로 인해 사우디의 석유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자 자연스레 사우디에 제공한 안보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은 친환경 정책 기조에 따라 탈석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중동은 이와 같은 미국의 움직임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국가와 미국 간의 소원해진 관계 속에서 중국이 미국의 자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국이 사우디로부터 미국보다 많은 석유와 제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작년에는 중국과 사우디가 전략적 동반자 협정을 맺기까지 이르렀다. 러시아가 전쟁으로 휘청이자, 중국은 러시아를 지원하는 대신 결제 대금으로 위안화를 사용했으며, 이외에도 미국의 영향권인 중남미 지역, 전통적 우방으로 여겨진 중동 지역에도 위안화로 결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중국이 국제 무역에서 사용되는 화폐를 위안화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보이며 달러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 당장 달러 패권이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대다수 전문가는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하고 있다. 먼저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용해 위안화 결제 비중을 크게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전체 결제 통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은 것이 그 이유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위안화는 국제 결제 통화 순위에서 5위로, 전체 결제 비중에서 2.29%를 차지하였으나 42.71%인 미국 달러, 31.74%인 유로에 비해서는 매우 낮으며, 영국 파운드화나 일본 엔화보다도 사용량이 적다.
또한 중국과 중동의 관계가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페트로 달러 체제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12월에 열린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원유 대금을 위안화로 하길 제안했지만, 사우디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그다른 국가들이 결제 통화로 수용할 가능성도 작고, 중국의 환율 결정 시스템이 투명하지 않아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등 위안화가 국제 결제 통화로서 가지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기축통화의 본질에 있다. 위안화가 기축통화로 되기 위해서는 위안화의 유통량이 많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위안화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중국이 장기간 대규모의 무역적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0년 가까이 엄청난 무역적자를 내며 달러를 기축통화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수출이 GDP의 8% 정도를 차지하는 미국과 다르게 중국은 20% 가량에 육박하고, 수출에 의존적인 중국이 장기적인 무역적자를 감당하긴 힘들다는 분석이 많다.
당장 달러의 지위를 위협할 수는 없지만, 위안화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위안화의 국제화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기적으로는 한국 기업의 환율에 따른 위험 정도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처럼 수출입에 달러를 주로 사용한다면 경상수지를 따질 때 원/달러 환율만 고려하면 되지만, 위안화 결제 비중이 늘어나는 경우 원/위안 환율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우리나라의 통화정책을 수립할 때 원/위안 환율과 중국의 통화정책을 고려해야 할 수 있다. 변화하는 세계 금융 상황에 유연한 대응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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