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해석에서 역사의 재구성까지
텍스트 해석에서 역사의 재구성까지
  • 박상준 / 인문 교수
  • 승인 2023.04.17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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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현대 한국인과 사회의 탄생’
▲이광수 무정 연재 1회(每日申報, 1917년 1월 1일자)

우리대학에는 개교와 더불어 설립된 인문사회학부가 있다. 사정이 이래도 많은 사람들이 인문사회학부의 존재를 잘 모른다. 교양 과정에 해당하는 강의를 하는 교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면 인문사회학부에서도 연구를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런 황당한 질문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터라, 내 주요 연구 성과를 소개해 달라는 이 기회에 인문학자의 연구가 갖는 특징도 함께 말해 보고자 한다.

문학, 역사, 철학을 망라하는 인문학 분야 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혼자’ 연구한다. 실험 장비를 쓰지 않으니 실험실도, 실험실을 운영할 보조 인력도 필요 없다. 물론 연구실은 있어야 한다. 컴퓨터를 쓸 책상을 놓아야 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연구 자료에 해당하는 온갖 책들을 손 닿는 곳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자의 연구실은 작은 도서관이다. 내 연구실에도 7천여 권의 책들이 분야별로 나뉘어 사방 벽면의 천장까지 닿은 책장들에 가득히 꽂혀 있다. 컴퓨터에도 전자책과 논문들이 여러 폴더에 가득하다.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수많은 학술지 논문들과 옛날의 신문 자료들 또한 인문학자의 연구 자료이다. 이런 자료들, 텍스트들을 대상으로 해서 인문학자는 혼자 연구한다.

한국 현대문학 연구자인 내 최근 연구서는 ‘현대 한국인과 사회의 탄생’(소명출판, 2022)이다. 총 448쪽, 36만여 자 분량의 책이다. 쓰는 데 3년 정도 걸렸다. 오래 걸린 것은 아니다. 이전에 쓴 ‘형성기 한국 근대소설 텍스트의 시학’(소명출판, 2015) 같은 경우는 구상에서 출간까지 10년이 걸렸다. 물론 전문학술지 논문을 쓰는 데는 그보다 훨씬 적게 걸려서 빠르게는 두어 달 만에 쓰기도 한다(학술지에 투고해서 심사를 거쳐 출판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평소에 해 둔 공부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쓸 수 없으니 기본적으로 몇 년씩은 걸리는 셈이다.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린 뒤 한두 달 고민해서 쓸 수 있는 제대로 된 인문학 논문은 없다고 하겠다.

인문학 연구에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긴 시간에 걸친 공부가 바탕이 된다는 말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연구자가 되기 위해 대학원 과정을 거치고 하는, 모든 분과학문에 공통되는 수련 과정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앞의 말은, 인문학 연구가 기본적으로 갖는 누적적인 특징을 뜻한다. 다시 내 전공으로 좁혀 설명해 본다. 문학 연구는 과거의 문학 활동과 그것에 대한 기존의 연구 두 가지를 대상으로 하는데, 그 결과로 긴 시간에 걸친 이중의 텍스트들과 씨름한다. 예를 들어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연구한다 할 때, 1917년에 연재된 작품이 일차적인 연구 대상이고 그 작품에 대한 지금까지 국문학 연구의 총체가 이차적인 연구 대상이 된다. 철학이나 역사 연구도 마찬가지다.

인문학 연구가 이렇게 누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를 대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학에서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성공한 것일 뿐 과거의 유사 연구와 무엇이 같고 다른가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물질세계나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의 경우도 새롭게 밝히는 것이 있으면 충분하지 과거의 논리를 어떻게 수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와는 달리 인문학은 일차적인 연구 대상에 대한 해석과 평가의 면에서, 이차적인 연구 대상이 되는 기존의 연구들과 씨름하면서 자신의 올바름과 새로움을 주장해야 한다. 이렇게 인문학 연구는 시종일관 이론의 자장 속에서 진행된다. 자신을 가치 있는 연구로 세워 줄 내용상의 새로움을 과거 연구와의 차이에서 입증하는 것이다.

‘현대 한국인과 사회의 탄생’이라는 내 최근 연구서는 1900년 전후로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기간 이 땅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인간이 등장하고 현대사회가 형성되는 양상을 밝힌다. 해당 시기 문학작품과 신문이나 잡지 등의 기사가 일차적인 연구 대상이고, 이와 관련된 국문학계와 국사학계, 사회학계 등의 관련 연구가 이차적인 대상이다. 일차 대상에 대한 해석의 새로움이 곧 이 책이 연구서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이상적인 인간형의 제시로부터 계급이라는 집단 주체의 등장으로 현대인의 탄생을 밝히고, 계급 및 계층을 핵심으로 하는 상황의 구조화로 현대사회의 형성을 설명했다. 문학작품을 창으로 해서 이런 작업을 수행한 것도 이 책의 고유한 특징인데, 이 과정에서 이차 대상인 국문학계의 기존 연구들을 비판하기도 하고 국사학계나 사회학계 등의 관련 연구들을 선별적으로 참조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설명해 본다. 이 책에서 나는, 사회 상황의 변화와 그에 따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의 변화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 발전을 추적했다.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현대문학의 특징을 활용해서 여러 작품들에 재현돼 있는 사회상의 변화를 재구성하고, 주요 인물의 구성 양상과 그들이 보이는 지향을 통해 인간관, 사회관의 변화를 확인했다. △1900년대 애국계몽 문학 △1910년대 계몽주의 문학 △1920년대 초 동인지 문학의 변화를 통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개인 주체가 등장하는 양상을 살피고, 1920년대 중반 이후 10여 년간의 좌파문학에서 재현된바 식민지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통해 계급 주체의 등장을 확인했다. 자신을 욕망과 이상을 가진 주체로 의식하는 인간의 등장과,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과 식민 조선 다른 한편으로는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라는 갈등 속에서 형성되는 집단 주체들의 상태에 따른 사회의 변화, 이것이 현대인과 현대사회의 탄생임을 밝혔다.

이런 연구는 100년 전의 텍스트를 일차적인 검토 대상으로 삼는다. 당시의 사회 상황이나 인간관, 사회관을 확인하기 위해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신문이나 잡지 기사 등을 검토한다. 그와 더불어 각 작품과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 기사 등에 대한 기존 연구를 참조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자기 연구의 진실성과 새로움을 갖춘다.

여기에서 관건은 텍스트를 제대로 해석하는 일이다. 보고 싶은 부분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이든 신문 기사든 해당 텍스트 전체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주장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결과가 사회 역사적인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띠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를 재현하는 것인지, 희망을 표현하는 것인지를 확정해야 한다. 이 과정은 여러 텍스트들에 대해 이전 연구들이 행한 검토 결과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인문학 연구가 누적적인 특징을 갖는다 함은 이를 말한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연구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역사의 재구성에서 찾아진다. 백 년 전, 천 년 전의 텍스트를 검토하는 것은 죽어버린 과거를 엿보는 일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인문학의 궁극적인 관심을 충족시키는 한편, 보다 인간적인 삶과 보다 이상적인 인간 사회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우리 모두의 안목을 부단히 갱신하기 위해 과거를 살피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해서, 인문학 연구의 본질은 ‘미래 기획의 일환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 있다고 말해진다. 당장의 물질적 필요에 직접 닿지는 않지만, 인간의 본질을 발양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러한 인간성 발양을 북돋을 수 있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역사적으로 탐구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연구는 없어서는 안 되는 지적 활동이다.

▲이광수 무정 연재 1회(每日申報, 1917년 1월 1일자)
▲저서 ‘현대 한국인과 사회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