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 뒤에 숨은 이들에게
익명성 뒤에 숨은 이들에게
  • 고평강 기자
  • 승인 2023.01.07 0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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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카타르 월드컵의 여정을 16강 진출이라는 성과로 마무리했다. 월드컵 동안 노력하는 선수들에게 많은 이들이 열정 가득한 응원을 보냈고 나 역시도 새벽같이 일어나 응원하곤 했다. 다만 그 열정이 너무 과해 때론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아쉬운 모습을 보인 선수나 심판을 대상으로 SNS 등에서 도를 넘는 부정적 댓글, 이른바 악플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가나전 경기를 조기 종료한 앤서니 테일러 심판의 SNS 계정은 경기 내용을 넘어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악플 28만여 개로 도배되기도 했다. 인터넷 익명성에 기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 것이다.

익명성은 ‘어떤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사회적 특성’이다. 이는 공인이 아닌 일반적인 대중이 내부 고발이나 개인의 사정 등을 부담 없이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특성이며,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게만 들으면 장점만 있는 특성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의견 파급력이 강한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그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익명성은 범죄 도구로 쓰이거나, 이번 가나전에 패배한 후, 가나를 응원했던 가나인 유튜버에게 악플을 달아 화제가 된 ‘가나 쌍둥이 악플 사건’처럼 절제되지 않은 마녀사냥 등의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익명성을 이용한 범죄 사례는 지난 2020년 도마에 올랐던 N번방 사태가 대표적이다. 강력한 보안과 익명성 보장을 앞세운 텔레그램을 이용한 범죄가 밝혀지며 사람들은 과연 텔레그램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됐다. 암호화폐 역시 경제 범죄의 도구로 활용되는 등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어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범죄 도구로 활용되는 문제도 심각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악플’이다. 익명성이 야기하는 악플은 크게 두 가지 문제로 나뉜다. 첫 번째는 표현의 과격화다. 발화자 간 직접 마주하는 대화와 달리 인터넷상의 채팅과 댓글은 과격한 표현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실제로 사이버 폭력 등의 온라인 범죄가 발생하는 이유는 사용자가 익명성의 뒤에 숨어 점점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탓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익명성이 있기에 의견을 표현하기에 앞서 고민을 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려 마녀사냥식으로 의견을 표출한다는 점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손흥민 선수의 경기는 가나전 때 부정적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반면, 멋진 활약을 보여 승리한 포르투갈전 이후에는 긍정적 의견만 남았다. 어차피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생각에 의견 하나하나가 가벼워지고, 사람들은 그저 보이는 의견을 따라가게 된다.

익명성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권력에 대항해 목소리를 내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하지만 상기한 단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단점을 줄이고 장점만을 취하기 위해선 어떤 태도로 익명성을 활용해야 할까? 먼저 의견을 표현하기 전에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의견을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단순히 상황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주관을 가질 수 있도록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 익명성에 의해 표현의 무게가 가벼워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익명성의 뒤에 숨은 이들이 이제는 말과 글의 진중함을 알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