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철 어김없는 ‘족보 구합니다’ … 관습인가 악습인가
시험철 어김없는 ‘족보 구합니다’ … 관습인가 악습인가
  • 안윤겸, 이태훈, 조민석 기자
  • 승인 2022.06.20 0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자 이번 학기에도 어김없이 캠퍼스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기출문제, 이른바 ‘족보’를 찾는 글들이 쏟아졌다. 족보는 지난 학기들의 기출문제와 보고서 등을 서류화해 공유되는 문서를 뜻하는 대학가 은어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대학가의 관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해 수많은 대학생에게 일상적인 문화가 됐다. 족보를 통해 학생들은 출제 경향과 시험 유형을 파악하고, 학습 방향을 성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의 폐쇄적인 공유 경로에 따른 형평성 문제와 저작권 문제 등이 꾸준히 지적되고 있다. 본지는 우리대학의 족보 문화에 관해 학우들과 교수자의 생각을 들어보고 문제점과 개선책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에 지난달 23일부터 26일까지 우리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총 130명의 학우가 설문에 응답했다.

 

우리는 왜 족보를 찾는가

족보 인식 실태 설문조사 결과 130명의 응답자 중 89%(116명)의 학생들이 학내 족보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중 87.9%(102명)의 학생들이 족보를 취득해 사용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고, 62.1%(72명)가 족보를 공유한 경험이 있었다. 학생들이 족보를 이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학생들은 공통으로 시험 문제의 유형을 파악하고 공부의 방향성을 찾기 위해 족보를 이용했다. 한 학우는 “수업에서 배운 내용과 시험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라며 이런 수업의 경우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족보가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또한, 교과서 외 양질의 문제들을 풀어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공부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재작년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학습에 혼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해 기출문제를 직접 공개한 정덕종(인문) 교수는 기출문제를 제공한 이후 학생들의 성적과 실력이 향상됐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학생들의 공부량이 전체적으로 증가하면서 성적 상승에 미친 영향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비슷한 경향을 유지해온 것으로 미뤄봤을 때 기출문제를 풀어보는 것이 실력 상승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폐쇄적인 족보 공유, 인맥도 실력인가요?

그러나 족보의 장점은 어디까지나 족보를 취득한 학생에게만 주어진다. 강의 족보 공유는 대부분 개인적인 교류를 통해 이뤄진다. 본지의 설문조사 결과 선후배나 지인을 통해 개인적으로 족보를 공유한 사례가 80.2%(85개 응답), 학과나 분반 드라이브를 통해 족보를 얻은 사례가 72.6%(77개 응답)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에브리타임 등 캠퍼스 커뮤니티를 통해 족보를 얻었다는 응답도 있었다. 선후배나 지인을 통해 개인적으로 족보를 입수하거나 학생단체 등 소규모 집단내에서 암암리에 족보가 공유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경로다. 몇몇 학과의 경우 학과 학생들이 후배들을 위해 족보를 남기는 문화가 형성돼 있고 이는 주로 전공생들만 접근할 수 있는 드라이브를 통해 공유된다. 이 경우 해당 학과 플랫폼에 공유되는 일부 과목들에 대해 주전공생과 타 학과 학생 사이 정보 접근 능력에 차이가 발생한다. 이처럼 특정 집단 내에서의 공유나 개인적인 인맥을 통한 공유 등 상당히 폐쇄적인 방식으로 족보가 공유되고 있어 접근성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설문 응답 인원 중 78.3%(96명)가 족보가 성적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응답한 것과 같이, 족보가 단순히 학습의 질을 높일 뿐만이 아니라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많은 학생이 족보 문제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한 학우는 “시험이 끝난 후 시험장에서 나오는 다른 학생들이 시험이 기출문제와 똑같이 출제돼 쉽게 풀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학과의 학생회비를 지불한 학생들에게만 족보가 제공되고 있어서 나는 구할 수가 없었다”라며 돈으로 족보를 구매해 성적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에 회의감이 들었고 공부를 위해 쏟은 노력에 허무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다른 학우도 “족보를 통한 정보와 자료 접근의 불균형이 성적 검증 능력 자체를 의심하게 하고 대학에서의 평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족보로 인한 형평성 문제를 언급했다. 반면 “족보를 구하는 인맥을 형성하는 것 또한 실력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족보로 인한 폐단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몇몇 있었다.

 

▲족보 인식 조사 결과
▲족보 인식 조사 결과

시험 문제도 저작물, 위법 가능성 있어

족보는 학생 성적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험 문제는 교수자의 창의적 사상이 표현된 것으로 저작권법상 출제자의 저작물로 분류된다. 저작권법 제136조 2항에서 저작물 공유 및 유포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어 출제자의 동의 없이 기출문제를 서류화하고 유포하는 족보 공유는 위법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 정채연(인문) 교수는 “구전으로 기록해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공정 이용의 범위에서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지만, 이를 넘어서면 출제자나 대학에서 문제를 제기할 경우 징계 사유가 될 수도 있다”라며 저작물인 시험 문제를 족보로 전환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전했다. 특히 대규모 플랫폼을 통한 동의 없는 족보 공개 및 유통 혹은 영리적인 목적의 사용은 인터넷 기록이 남으면 저작권법 위반의 증거가 돼 벌칙 조항에 따라 처벌받거나 교칙 위반으로 징계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시험 전 문제 유출 금지와 관련한 윤리 서약을 했을 경우에도 승인 없이 문제를 유출하면 시험 부정행위로 판단될 수 있다.

 

뿌리 깊은 족보 문화, 폐단 어떻게 해결하나

족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학교 차원에서 족보에 따른 형평성을 지적하거나 개입할 수 있는 평가·출제 규정이 따로 마련돼있지 않아 평가자와 이용자만이 바꿀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족보 문제가 지속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 반복되는 시험 문제가 지적된다. 매 학기 같은 문제가 출제되면 족보를 통해 정보를 얻은 학생과 족보가 없는 학생 간 형평성이 발생한다. 반복적인 시험 문제 출제는 수강생들의 학습 의욕을 떨어뜨리고 성적만을 위한 학습 편법을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수자가 매번 새로운 문제를 출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서종철(화학) 교수는 “항상 문제를 변형하려고 노력하지만 동일한 수업 내용에서 출제할 수 있는 유형이 한정돼있기 때문에 지난 시험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는 것은 불가피하다”라며 새로운 문제 개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조성현(컴공) 교수 또한 “족보 문화 폐단을 지우고자 매 학기 노력을 기울여도 해당 과목에서 학생들이 꼭 알아가기를 바라는 중요 내용과 핵심 개념이 바뀌지는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문제를 출제할 수밖에 없다”라며 반복되는 교과 과정의 한계를 강조했다. 시험이 기출문제와 비슷하게 출제됐을 때 학생들의 성적이 향상돼도, 족보를 본 학생들이 답을 외운 것인지 더 나은 학습을 통해 발전한 것인지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은 문제 해결을 더 까다롭게 만든다.

이미 대학가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족보 문화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교수와 학생들 모두의 양심과 의지가 필요하다. 일차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학우가 제안한 방안은 교수자가 직접 기출문제를 공개하는 것이다. 다만 기출문제가 모두 공개될 경우 변별력을 위해 교수가 매번 시험 문제를 새로 개발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실제로 기출문제를 공개하는 정덕종 교수는 “기출문제에 구애받지 않는 평가를 위해 배운 내용을 현실의 사례에 응용하는 주관식 유형의 평가 방식도 고민 중이다”라며 공정한 평가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새로운 평가 방식을 도입하거나 학과 차원에서 과목 담당 교수를 교체하는 방식 또한 해결책 중 하나이다.

학생들도 우리대학 내에서의 족보 문화가 폐단의 가지를 뻗지 않도록 문제의식을 느끼고 저작권법을 인식해 각자의 윤리와 양심의 선 안에서만 족보를 공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족보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노력이다. 정채연 교수는 “천자문 만자문 이야기에서 한 제자가 길을 떠나 만자문을 배운 것처럼, 우리는 만자문을 익히기 위해 대학에 온 것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학점에 집착하고 경쟁하면 천자문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다”라며 학생들이 학점 경쟁에서 벗어나 진정한 공부의 길을 찾아가기를 당부했다. 과열된 학점 경쟁 속 당연한 관습이 돼버린 족보 문화의 폐단에 경각심을 가지고,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는 개인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