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된 개인, 나노 사회
파편화된 개인, 나노 사회
  • 탁영채 기자
  • 승인 2022.05.15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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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트렌드 키워드로 뽑힌 나노 사회(출처: 이미지투데이)
▲2022 트렌드 키워드로 뽑힌 나노 사회(출처: 이미지투데이)

사회 구성원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대화를 위해 평소 어떤 유튜브 콘텐츠를 즐겨보는지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의 나이, 성별, 지역 등의 정보보다 유튜브에서 어떤 것을 보는지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화된 콘텐츠와 함께 사람들의 개성이 강해지면서 특정 단체, 모임, 가족 단위보다 더 나눠진 1인만을 위한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나노 사회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트렌드로 조각조각 쪼개진 사회를 뜻한다. 이는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사회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읽힐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 구성원이 각자도생하고, 양극화된 단절의 사회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산업화와 정보화 △개인주의 심화 △소가족화 진행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우리는 본격적으로 나노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배달앱, 전자 상거래 플랫폼, SNS, 동영상 앱, 채팅 서비스 등 스마트폰과 우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삶의 동반자가 된 스마트폰이 알고리즘에 따라 개인화된 콘텐츠를 제공하며 다른 사람은 물론 친한 친구, 가족과도 관심사가 달라졌다. 

코로나19 사태로 본격화된 비대면 방식의 수업과 업무는 집단 내 구성원의 교류를 줄이고 지식만 전달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수업만큼이나 대외활동이 큰 축을 이루는 대학생활의 경우 코로나19 사태가 개인주의 문화의 기폭제가 됐다. 또한, TV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스마트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다수가 한 콘텐츠를 공유하기보다 각자가 개인 맞춤형 콘텐츠를 즐기기 시작했다. △넷플릭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스마트폰 앱의 알고리즘이 고객 정보에 기반해 추천 영상과 게시물, 사용자 맞춤 광고 등 맞춤형 콘텐츠를 지속해서 제공한다. 이렇게 개인 간의 교집합이 줄어드는 나노 사회로 진입하면서 지인과 멀어지고, 불특정 다수와 약한 유대 관계를 맺은 누군가가 많은 영향을 주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기존에도 사회의 개인화가 여러 차례 주목된 바 있으나, 최근 들어 유난히 나노 사회가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단어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는 최근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나노 사회의 특징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노 사회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사회 구성원 다수가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과 일치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을 가진다는 점이다. 개개인이 자신에게 맞춰진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길들여지고 자신의 관심사에 맞는 정보를 접하면서 자신의 견해와 맞는 사람과만 소통하기에 반대되는 목소리는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팬덤 정치가 있다. 팬덤 정치는 정치인에 대한 팬심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정치를 말하는데, 처음에는 무관심층의 정치 참여를 이끄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많았다. 그러나 나노 사회로의 진입에 따라 확증 편향을 가진 사회 구성원이 점차 늘어났고, 이들이 상대 정치 진영의 혐오를 부추기거나 과격한 목소리로 다수를 대표하는 등의 역효과를 내고 있다.

나노 사회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가치를 중시하고 각자도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직장에 대한 인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작년에 발표한 ‘최근 10년간 가장 중요시한 직업가치’ 설문조사에서 MZ세대는 △몸과 마음의 여유 △직업 안정 △금전적 보상을 각각 1위, 2위, 3위로 뽑았다. 또한,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져 가고 있으며 필요할 때마다 일하는 임시직을 선호하고 이직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점을 통해 전체보다는 개개인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모습도 드러냈다. 

‘나의 트렌드를 당신이 모르는 것이 요즘의 트렌드다’는 나노 사회를 가장 잘 나타내는 문장이다. 나노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주류 트렌드인지 알기 어렵고, 어쩌면 주류 트렌드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에는 유명한 드라마나 예능의 시청률이 40%에 육박하는 등 다수가 공유하는 콘텐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각 주제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사가 매우 다르다. 주말이면 ‘무한도전’, ‘1박2일’ 등 특정 예능 프로그램에 전국민의 관심사가 몰렸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다양해진 프로그램만큼 각자의 관심사가 여러 프로그램으로 분산되고 있다. 유튜브에서 자신이 즐겨보는 유튜버의 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유명하더라도 가족, 친구 등 주변 사람이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중의 취향이 파편화되면서 하나의 유행이 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원자 단위로 잘게 나눠지고 있다. 

앞으로 나노 사회로의 진입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 명확한 만큼,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개인이 단절될 것이다. 이런 나노 사회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기르고, 이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또한, 알고리즘에 따른 맞춤 추천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사회의 변화에도 부드럽게 대처하는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오랜 시간 동안 변화를 거듭하며 꾸준히 발전해온 만큼, 우려 섞인 시선으로만 보기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