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단순 에탄올 섭취의 생리적인 의미를 넘어 일상생활의 향기와 다양한 사회·문화·규범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술은 △피로와 시름을 잊게 하는 피로 회복제 △풍류와 놀이를 즐기는 여흥을 위한 음료 △손님을 접대하는 음료 △마음의 문을 열고 벗과 우정을 나누는 음식 등 다양한 역할을 해왔으며, 수많은 사람의 독특한 삶과 문화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창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옛말에, 한 고을의 정치는 술에서 보고, 한 집의 일은 양념 맛에서 본다. 대개 이 두 가지가 좋으면 그 밖의 일은 자연 알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과거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역 사회의 삶과 생활양식을 술에 녹여왔음을 말해준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술이 있었듯, 한반도 최남단, 제주에서도 특색있는 술에 제주만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혼디 모여 빚은 전통주에 제주의 삶을 담다
여유가 한가득 내려앉은 제주 신례리에는 기자들의 걸음마다 감귤 농가가 줄지어 있었다. 그사이 자리한 아담한 양조장 ‘시트러스’의 문을 두드리자 오묘한 술 향기와 함께 따뜻한 웃음의 김예원 과장이 기자들을 반겼다. 시트러스는 제주 명물인 감귤을 이용해 술을 만드는 양조장으로, 140여 감귤 농가들이 모여 만든 농업회사법인이다.
대표적인 겨울 과일이자 제주의 특산품으로 알려진 제주 감귤은 새콤달콤하고 향긋한 맛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국내 감귤 재배가 많지 않아 비싼 과일이었으나 지구온난화로 재배 지역이 내륙으로 확장되면서 가치가 떨어졌다. 특히, 맛이 좋아도 너무 크거나 작은 귤은 상품으로 판매되지 않고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과거 신례리장을 지내던 김공률 대표는 제주 감귤의 부가가치를 높여 농가를 살리고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감귤 농가들과 마음을 모아 주류 제조 사업에 도전했다. 2013년 시트러스 공장이 설립됐고, 2015년 주류업계의 대가 이용익 공장장이 함께하면서 시트러스 제주 감귤주의 역사가 시작됐다.
시트러스 양조장 앞 수많은 운반 상자 안에는 탐스러운 귤이 가득 차 있었다. 시트러스의 제주 감귤주에 사용되는 제주 재래종 온주귤이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귤 대부분이 온주귤의 개량종이고, 신례리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감귤종이기도 하다. 시트러스에서는 비상품 온주귤 중 껍질을 까기 쉬운 큰 귤을 이용한다. 140여 농가에서 공급한 비상품 귤들은 박피되고 착즙된 후 주수, 효모와 함께 발효통에서 발효된다. 이후 여과 공정을 거쳐 모은 발효액을 살균하고, 부드럽게 숙성시키면 12% 도수의 감귤 발효주인 ‘혼디주’가 만들어진다. 이를 다시 저온 감압 증류를 거쳐 적절한 비율로 조합하고 목통에서 추가로 숙성시키면 증류주 ‘미상’과 ‘신례명주’가 완성된다.
기자들이 맛본 혼디주는 귤의 단맛에 신맛이 더해져 술의 시원함이 한층 샘솟았고, 상큼한 끝맛 덕분에 깔끔하면서도 감칠맛이 뛰어났다. 증류주 미상은 오크통에서 부드럽게 숙성되면서 신비한 향과 감귤의 풍미가 더해졌다. 술에서 맛보는 감귤의 상쾌함과 맛매는, 제주만의 친숙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한껏 느끼게 했다.
감귤주 개발을 책임지는 이 공장장은 감귤주 개발에서 가장 어려운 과정으로 발효 기술 정립과 시설 최적화를 꼽았다. 발효주 제작에 최적화된 원료, 발효 온도와 기간, 온도 변화 기술과 시설을 처음 확립할 때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다음으로는 시설과 기술 관리 과정이 오래 걸린다. 특히 이 공장장은 수많은 술을 개발하면서 가장 해결하기 까다로운 것이 술을 발효할 때 사용할 효모 선정임을 강조했다. 감귤 발효 과정에서 사용되는 효모는 발효주 제작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시트러스의 효모 선정은 제주 서귀포에 설립된 감귤 연구소의 도움을 받았다. 감귤 연구소에서 미생물을 채취하고 관찰했고, 알코올 생성능, 산 생성능, 변질 가능성 면에서 우수한 효모에 대해 특허를 냈다. 시트러스에서는 해당 효모를 사용해 발효주를 제작한다.
발효 과정과 시설 최적화에 공을 들인 만큼, 양조장에는 시스템 정비에 공들인 흔적이 가득했다. 특히, 과일을 껍질째 사용하는 많은 전통주와 달리 혼디주는 모두 수작업으로 껍질을 벗긴 귤의 알맹이만 사용한다. 껍질이 잔류하면 펙티네이스에 의해 발효 중 메탄올이 생성돼 술맛을 해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까다로운 과정을 도입한 것이다. 지하 1층 숙성실은 문을 열자마자 술 익는 냄새가 가득했다. 대부분 미국산 오크가 사용됐고, 일부는 숙성 용기에 따른 향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리무쟁 오크에서 숙성됐다. 몇 년 전 기사 사진으로 접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진 오크통은 시트러스의 성장세를 짐작하게끔 했다.
시트러스를 대표하는 감귤발효주 혼디주의 ‘혼디’는 ‘함께’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첫 작품의 이름처럼 시트러스는 마을 주민과 전문가들이 혼디(함께) 모여 만든 공동체 기업이다. 제주의 유구한 역사를 함께한 감귤이 버려지는 모습을 보고 수많은 감귤 농가가 출자금을 마련했고, 오랜 경험의 노하우와 실력을 농촌에 환원하고자 한 이 공장장이 합류한 뒤 감귤 연구소가 협업하며 현재의 시트러스가 탄생했다.
양조 기술이나 경영 면에서 비전문가인 농촌조합원이 모여 시작했기에, 회사 설립 초기에는 재정난이 있었다. 손익 분기점을 넘긴 지는 겨우 3년이 지났다. 비록 수년간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운영이 쉽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농부와 지원자의 동행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시트러스는 이 공장장의 영입으로 기술·판매·홍보 등의 예산 사용을 일부 안정화했고, 재작년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를 만나 유통, 홍보, 디자인 등에 도움을 받으며 성장해왔다. 이 공장장은 “이제 어려운 시기는 지났으니 남은 과제는 안정화하고 더 발전시키는 것이다. 초기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아주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상기했다. 시트러스의 행보는 감히 제주 감귤의 가치와 품격을 어떻게 바꿔갈 지 기대하게 한다. 함께 만든 명품술 속에 빚어낼 제주의 향기와 신례리의 삶이 더욱 궁금해진다.
제주의 자연환경과 함께 즐기는 이색 맥주 문화
음식과 문화로 빚은 전통주뿐만 아니라 제주의 자연환경이 스며든 맥주가 있다는 소식에 기자들은 제주도의 최서단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수제 맥주 제조기업인 제주맥주. 2015년 창립된 제주맥주는 하루 평균 약 10만 캔의 맥주를 생산한다. 입구에 다다르자 깔끔한 4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해당 건물은 1층의 층고를 높게 지어 양조장으로 사용하고, 2층은 투어 공간, 3층은 펍, 4층은 사무실로 이뤄져 있다. 기자들은 제주맥주에서 진행하는 양조장 투어에 참여해 제주의 개성과 함께 빚어낸 맥주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제주맥주는 제주도의 깨끗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제주의 특색을 담은 맥주를 만들고자 시작됐다. 로고는 제주도의 자연 특징인 바다와 바람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앙에서 폭발하는 한라산의 형상은 맥주가 분출되는 모습을 표현한다. 제주맥주가, 제주의 개성을 맥주에 담는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맥주의 기본 재료 네 가지를 알아야 한다. 맥주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맥아, 물, 홉, 효모가 필요하다. 특히 물은 맥주의 질감과 무게감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재료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화산섬인 제주도는 천연 암반에 의해 깨끗하게 걸러진 지하수로 유명하다. 땅속 깊이 존재하던 지하수에 대해 모르던 옛 제주에서는 물을 귀하게 생각해 생명수이자 귀한 자원으로 여겼다. 제주맥주는 깨끗한 제주의 물을 사용해 맥주의 특색있는 맛과 역사를 구현한다.
투어를 따라가다 보면 맥주의 종류에 관한 설명이 지도처럼 그려진 큰 벽을 마주한다. 맥주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라거와 에일, 두 종류로 나뉜다. 카스(Cass), 테라(Terra)와 같이 국내 대기업의 주류 맥주는 대부분 라이트 라거로, 탄산의 청량함과 깔끔한 뒷맛이 특징이다. 국내 대기업에서 오직 라이트 라거만을 생산하고 있어 획일화된 맥주 맛을 즐겨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던 제주맥주는, 자사의 세 가지 맥주 모두 에일로 생산하고 있다. 더구나 깊은 향과 풍성한 맛이 특징인 에일은 제주맥주가 담아내는 제주의 향기를 더욱 부각한다. 제주맥주의 대표 맥주인 ‘제주 위트 에일’은 제주의 특산물인 감귤을 맥주와 잘 융합하기 위해 여러 에일 종류 중 ‘벨지안 위트 비어’로 개발됐다. 벨지안 위트 비어는 오렌지 껍질을 이용한 맥주로, 제주 감귤의 껍질을 이용해 맥주를 만들기 가장 적합한 배합이다. 제주맥주는 맥주를 가열하는 단계에서 말린 귤껍질을 넣어 귤 향과 맛을 낸다.
투어 이후에는 3층 펍에서 제주맥주 3종과 타사 라거 맥주를 시음했다. 맥주의 맛을 느끼기보다 알코올을 마시는 데 열중하던 평소와 달리 에일의 풍성한 향과 재료들이 만들어낸 맥주의 촉감에 집중하며 음미해보니 한 부룻의 여유를 들이키며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맥주는 양조장 투어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맥주와 제주를 함께 즐길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제주 한 달 살기 행사로 제주 현지의 삶을 선물하거나 다양한 브랜드와의 콜라보 작업을 통해 특색있는 새로운 맥주를 개발하는 등 제주만의 새로운 맥주 문화를 선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50년 이상 주류업계에 몸담은 시트러스 이용익 공장장은 술이 종합예술이라고 말한다. 술만큼 인간의 희로애락에 관여하고, 수많은 삶을 담아 빚어지는 음식이 어디 있으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친근한 섬이면서도 내륙과는 다른 신선함을 지닌 제주도에서 기자들은 두 기업의 술을 통해 제주의 삶을 엿봤다. 함께 모여 특산물로 빚은 전통주, 자연환경과 자원이 밴 이색 맥주는 각기 제주의 문화와 역사, 정체성을 뚜렷이 외치고 있었다. 시트러스와 제주맥주의 끊임없는 성장을 소망하며, 다양한 곳에서 지역 특색을 담은 수많은 독창적인 술 문화가 계승돼 지역 산업 발전을 이룩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