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황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반응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이 학교는 너무 바쁘고 놀 것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이 학교는 바쁘지만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야’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주변 환경이 요인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이 중요하다는 뻔한 소리이다. 하지만 막연한 긍정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막연한 긍정주의는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보다는 그냥 ‘앞으로 잘되겠지’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에서 삶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신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인간 최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삶이 통제 당하고 최악의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는 자유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삶에게 자신이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절대 좋게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이고 그래야만 사람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삶에게 자신이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이 없는 세상은 무의미하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야기이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경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 세상에 의미를 줄 수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경이롭게 느끼며 어떤 상황에도 힘을 내서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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