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6구에 위치한 생제르맹데프레 교회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던 르네 데카르트가 잠들어있다. 파리에 머물다 그 주변을 지날 때면, 나는 빠짐없이 생제르맹데프레에 들러 부속 예배실 한편에 놓인 그 무덤 앞에 서곤 한다. 근대학문 전반에 그가 끼친 영향은 가늠할 길 없이 크지만, 그의 고전적인 합리주의는 어떤 면에서 지금 21세기 현실과 더 치열하게 맞닿아 있는 것만 같다. 데카르트는 그의 책 방법서설에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실체이원론을 논하는 가운데, ‘인간’과 ‘기계’를 가르는 구분법을 제시했다. 그중 첫번째가 바로 ‘언어를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는 능력’이다. 데카르트가 스웨덴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고 삼백 년 뒤, 영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공학의 개척자였던 앨런 튜링이 인공지능의 충분조건으로 언어 모방게임을 제안했을 때, 그는 분명 데카르트의 글을 참고했을 것이다. 이제 놀랍도록 그럴듯한 글을 써내는 인공지능 챗봇이 연일 화제가 되는 이 시점에, 여러분은 이 데카르트의 주장이 마침내 기각됐고 따라서 인간과 기계 사이의 존재론적인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럴듯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을까? 물론이다. 우리가 마음먹고 충분한 시간과 노력만 들인다면,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조각내 짜깁기하고 그럴듯한 글을 쓰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이 기술에 능통한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분야에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미 많은 사람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속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 인간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모방게임에 대단히 취약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보통 일상적인 신뢰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사기 행각이 드러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고, 종종 완전 범죄로 끝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식 모방자들의 가면 뒤에 있는 진실을 빠르게 폭로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상대를 향한 호의적 신뢰를 잠시 유보하고 방법론적 의심을 통한 ‘적대적 공격’에 나서는 일이다. 이는 상대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손쉽게 답할 수밖에 없을 질문을 던짐으로써 상대의 기이한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러분이 인공지능 챗봇의 그럴듯한 글쓰기 실력에 놀랐다면, 이런 적대적 공격에 그 챗봇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지는지를 보고 더 놀랄 것이다. 이런 기계들의 빈틈은 결코 쉽게 메꿔지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구분법은 최소한 아직 유효하다.
학자들은 아직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앎’이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길을 찾지 못했지만, 그 탐구의 길에 있어 언어가 가진 중요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큰 이견이 없다. 일상 언어가 고도의 추상화와 엄밀화를 거치면서 근대의 형식 언어로 발전했고 수학적 공리 체계와 컴퓨터 언어라는 꽃을 피웠다는 점을 돌아보면, 당연히 프로그래밍 언어도 일종의 외국어이며 코딩은 이 글쓰기의 과정이다. 챗봇도 그렇게 쓰인 글이다. 결국 지금 우리는, 어떤 글이 다른 글을 입력으로 받아 또 다른 글을 만들어내고 있는 온갖 글들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다. 이 시기에 글의 의미는 더욱 중요해진다. 글을 쓰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정신이 선취했던 암묵적 지식에 접속하는 일이다. 그것은 글이 가진 개별 요소들과 다층적인 결합 구조가 가리키는 의미를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핵심을 장악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섬광처럼 다가오는 계시와도 같다. 이 계시를 획득한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거짓 선지자들을 굴복시키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앎의 즐거움이란 이 능력을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온다.
여러 학생을 지도하는 교수가 된 지금, 나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학생들과 함께 토론하고 글을 쓰는 데 할애하고 있다. 글쓰기는 내게도 여전히 힘든 작업이지만, 그럴듯하면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 학생들의 글을 대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이다. 이 고통에 직면할 때면 나는 어느새 학생들에게 적대적 공격을 시전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인간임을 알고 또 그 빈틈이 메꿔질 것을 믿는다. 모든 도구가 그래왔듯이, 챗봇은 사용하기에 따라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이번 학기 챗봇을 어떤 방식으로 수업과 과제에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수업 담당 교수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꼭 기억하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안의 신비를 포착하고 드러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며, 이것은 그 희미한 빛을 명료하고 분절화된 언어로 차근차근 조각하는 글쓰기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러분이 무한한 언어의 세계 속에서 하나의 심오한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그 고통과 쾌락을 어리석게도 챗봇이라는 도구에 온전히 내어주는 바로 그 순간, 그때야말로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그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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