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포항, 이 땅에서 (4):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 구룡포 신사 터
문화 - 포항, 이 땅에서 (4):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 구룡포 신사 터
  • 김상수 기자
  • 승인 2015.05.0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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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바다에도 봄은 오는가
포항 여러 문화 보석들을 역사 순서대로 써내려가며, 결국 이 글을 쓸 날이 올 줄 알았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자행한 수많은 범죄들은 후대에서도 치가 떨릴 지경이다. 다만 아쉽게도 모두가 일제의 범죄를 교과서로 배울 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의 친척이 어떤 식으로 고통을 받았는지는 관심 없다. 교과서의 문장들은 잠깐의 분노 이상을 끌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교과서에서 벗어나, 작은 항구 구룡포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 어떨까.
1902년부터 일본의 어선들은 조금씩 장기면 모포리나 구룡포 일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구룡포의 특성상 황금어장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1909년에는 구룡포 포항사무소가 열리면서 아예 구룡포에 어업 근거지를 만들어 살았다. 그들에게 구룡포는 ‘엘도라도’였다. 거대한 물고기 떼가 그들을 맞았다. 얼마나 물고기가 많았으면 일제가 항공탐사를 하다 지도에도 없던 섬이 보여 다가가 보니 수면 위로 올라온 물고기 떼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곳에 이주해 온 일본인은 1933년에는 220호 937명으로 늘어났다. 순수 어부가 절반이었다. 지금까지도 근대문화 역사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수탈당한 물고기가 얼마나 많을지는 1936년 구룡포 출입 일본 선박이 1995척에 선박규모 13만 9천 182t이었다는 사실로 추측만 할 뿐이다. 2,000척에 가까운 배 중 우리 어부들의 배는 100여 척에 불과했다. 도가와 야사브로는 구룡포 수탈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다만 그가 구룡포를 개척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포항 도로 개설에 앞장서고 운수업을 시작했다. 또한, 구룡포에 첫 방파제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구룡포의 발전에 앞장선 은인일까? 주어 없는 문장은 언제나 위험하다. ‘누구’의 발전에 앞장섰을까. 잠깐 다시 그 당시 구룡포를 살펴보면, 작은 어항이었던 구룡포에 병원, 극장, 당구장, 심지어는 잡화점까지 있었다.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진 않았을 테다. 학교도 있었는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본인들만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구룡포 공원 자리에는 일본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서울 남산에 신사가 세워진 연도가 1925년이다. 1913년 지어진 구룡포 신사보다 12년 늦다. 구룡포가 한국이 ‘일본화’ 되는 데에 앞장선 셈이다. 좋은 도살용 칼을 샀다고 해서 가축을 위한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구룡포 공원에는 이 사람의 은혜를 기린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덧붙이자면 이들은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고, 1세대들의 자녀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본 땅으로 돌아가야 했다(물론 언어나 교육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들을 피해자로만 생각하긴 어렵다). 하여튼, 아직까지도 이들은 ‘구룡포회’라고 하는 모임을 만들어 종종 구룡포를 방문한다. 일본 정부 역시 아직도 우리 땅에 있는 적산 가옥들을 그들의 재산으로 보고 서류상이나마 관리를 하고 있다.
갑자기 고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울산의 암각화만 봐도 우리나라 바다를 뛰놀았던 많은 귀신고래들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1977년 울산에서 관측된 이후 다시는 동해에서 귀신고래를 관찰할 수 없다. 이 고래들은 일본이 잡아갔다. 이는 비유가 아니라 냉혹한 사실이다. 일본 수산청에 따르면 1910-1919년 987마리, 1920-1929년 271마리, 그리고 1930년부터 1949년까지도 61마리의 고래를 잡았다. 현재 오호츠크 해 근방의 귀신고래는 결코 동해로 들어오지 않는다. 슬픈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듯이. 고래조차 역사에 소홀했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