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루션보다는 명예제도
학기 초 어느 날 후배 한 명이 술에 거하게 취한 채 기자의 방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실연 당했나?’라고 생각한 기자에게 그 후배가 털어놓은 고민은 예상과 다르게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우리대학 너무 실망이에요”그 후배는 이어서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학교와는 너무 달라요. 우리대학 학생들은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공학도와는 전혀 딴판예요”라고 우리대학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말을 듣고 학교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기자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수 일 후, 기자가 숙제 기한에 허덕여 솔루션을 베끼고 있을 때 문득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의 기자는 어려운 수학 문제가 수 십분 동안 안 풀릴 때도 답안지를 덮어두며 ‘내 실력으로 풀고야 말겠다’라는 마인드를 가지며 자존심을 세웠던, 어쩌면 지금보다 더욱 공학도다운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던 ‘어린 공학도’였다. 하지만 솔루션을 베끼는 기자의 모습을 보면 기자가 고등학교 때의 패기와 자존심은 온데간데없는, ‘학점만 잘 따자’는 식으로 사는 ‘늙은(?) 공학도’로 전락해 버린 것 같다.
이런 성찰을 거듭하던 중 기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명예제도(Honor code)’이다. 명예제도는 학생들에게 전반적인 도덕성을 지니게끔 하는 사업이고, 더불어 ‘늙은 공학도’의 성찰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이상적인 사업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명예제도가 처음 대두되었던 98년부터 10년 동안 어떠한 이유 때문에 수차례 번복되다가 지금 와서야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명예제도라는 것은 말이야 딱딱한 느낌을 주는 ‘제도’지 사실상 ‘문화’이다. 명예문화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기자가 생각하기에 명예제도의 성공 여부는 제도 내용의 완결성보다는 문화 의식 정착 여부에 두고 싶다. 이런 문화 정착의 방법에 있어서 “명예를 지킵시다!”라고 학생들이 무리지어 구호만 외치는 것보다 선배가 전산 어싸인을 부탁하는 후배들에게 “이런 건 실력으로 해야지. 공대생 자존심이 있는데”라는 한 마디가 더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기자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명예제도의 ‘접근’ 방법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하고 싶다. 명예회원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집되고 회원들이 주기적으로 모임을 가짐으로써 그들만의 공감대와 문화를 형성한다. 이런 명예회원들이 일상에 여러 무리들과 생활하면서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을 주변 지인들에게 각인시켜 명예제도의 의식을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한다. 이런 시스템이 ‘확대 실시’될 경우 문화 정착은 수월할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확대 실시’다. 그러나 학생들이 명예제도에 대해 열린 태도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 확대 실시에 있어 큰 장애물이다. 현재 명예제도에 참여하는, 소위 ‘선구자’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데다 명예제도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여타 학생들의 시선도 “쓸데없이 도덕성 지켜서 뭐하나”, “너무 고리타분하다”라는 식으로 부정적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공학도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솔루션이나 친구 답안지보다는 명예제도다”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쉽게 우리의 어린 공학도 시절을 생각해보자. 학교나 학원에서 새로운 개념에 대해 배우면 이것을 내 실력으로 만들기 위해 ‘답안지는 저리 제쳐두고’ 끊임없이 복습하고, 연습문제를 풀었던 우리다. 하지만 대학에서 학점만을 잘 받기 위해 솔루션을 베끼고 친구 답안을 본다면 학점은 잘 받을지언정 전문화되어 가는 현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개인의 전문성은 버려지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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