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계단] ‘월경’이 두렵나
[78계단] ‘월경’이 두렵나
  • 황정은 기자
  • 승인 2004.01.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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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여자친구가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는 사인을 보낸다.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그거 있어?”라고 묻는다. “응?” 내가 반문하자 그녀는 “그거 있잖아. S대...”라고 대답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아. 갖고 올게.” 나는 그제서야 알아듣고 작은 주머니를 가지고 나와 아까의 한적한 곳으로 돌아가서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는 누가 볼세라 휙 낚아채어 화장실로 간다. 여자라면 이 ‘이상한’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알아채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남자들도 대부분 무슨 뜻인지 알겠지만 ‘순진한’ 남자들을 위해서 설명해주자면 이건 생리대를 달라고 하는 장면이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리대가 다 떨어졌을 때 한산한 시간을 택해 편의점에 생리대를 사러 갔더니 판매원이 생리대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주던 기억이 난다. 계산하는 동안 나는 혹시 누가 오지는 않을까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2002년에 이화여대 여학생회 홈페이지에서 ‘빨간 반지’라는 글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당시 나는 새로 구성되는 여학생회 기사를 쓰기 위해 다른 학교의 여학생회는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는 중이었다. 이 글의 내용인즉, 글쓴이는 생리중에 새끼손가락에 빨간 반지를 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반지에 대해 물을 때마다 스스럼없이 월경 반지라고 대답했고, 처음에는 이상한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적응하고 나자 주변의 배려 덕분에 생활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여성들이 생리중임을 굳이 숨기려 들지 말자고 역설했다.

그 글에 100%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월경 중이라는 걸 숨길 이유가 없다’는 생각만은 완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편의점에 가서 생리대를 사는 것이었다. 때는 점심 시간이었다. 나는 생리대를 집어다가 주저하지 않고 길게 늘어선 줄 뒤에 섰다. 계산을 하기까지 주변에서 힐끔힐끔 내 손에 들린 생리대를 쳐다보는 시선에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지만, 판매원이 검은 비닐봉지를 꺼낼 때 “그냥 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긴장감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바뀌었다.

그 뒤로 나는 필요할 때는 언제나 내가 생리중임을 밝히곤 했다. 술자리가 너무 늦게까지 간다 싶을 때, “생리하는 중이라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 잘래요.”라고 말하기도 했고 생리통이 심한 날에는 교수님께 “오늘은 생리통이 심해 강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라고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월경 중에 술자리를 지키지 않아도 되고, 생리통이 있는데 그걸 속이 안 좋다는 식의 거짓말로 둘러댈 필요도 없게 됐다. 정말 속이 다 시원했다.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 학교의 여건상 여성, 특히 여학생의 월경에 대한 배려를 남성 쪽에서 먼저 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술자리나 밤을 새워가며 하는 프로젝트는 월경 중인 여학생의 몸에 큰 무리를 준다. 또, 월경과 MT가 겹치면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생리대를 갈기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럴 때는 아무 근거 없는 수치심 따위는 벗어 던져 버리고 약간은 뻔뻔한 얼굴로 월경 때문에 힘들 것 같으니 배려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어떨까. 여학생이 많으면 다 같이 월경 안 걸리는 날을 잡기도 힘들지만, 우리 학교에는 여학생 수가 적으니 오히려 월경에 대한 배려를 받기가 더 좋을 것이다.

월경은 더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준비과정이라는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지만, 감정적으로 이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먼 옛날의 여자 조상들은 진화심리학적인 이유로 월경을 숨기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현대 여성들은 더 이상 월경을 숨길 필요가 없다. 여성해방 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쓸모없는 수치심을 버린다면 생활이 더욱 편리해지고 남성들과 좀더 바람직한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이다. 남성 입장에서도 함께 생활하는 여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짜증을 부리고 술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걸 보며 여자들이란 변덕이 심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보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시원하게 아는 편을 더 원하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