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강대국적 이데올로기가 테러에 의해 가라앉으면서 미국민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고 이를 군사적 방법으로 맞대응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불똥이 튈세라 재빨리 모든 테러단체들은 자신들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성명서로 발표하였으며, 대부분의 나라들이 미국의 군사 응징에 지지를 보내며 미국민들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하면서 협력적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같은 문제는 단순히 무분별한 보복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누가 저질렀는지에 대한 숙제를 풀기도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 인도문제를 놓고 그를 보호하는 국가까지 적으로 놓으면서 확실한 편가르기 식의 전쟁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미국의 군사적 행동을 확실히 지지하는 것은 아닌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중동지역 국가들은 테러 반대라는 원칙에 찬성하면서도 이를 빌미로 미국의 ‘국제사회의 편가르기’에는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슬람 나라들과의 갈등 관계에서 이같은 대응은 이슬람 나라들의 불만을 폭발시키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일 수도 있겠지만 그를 인도주의적 휴머니즘에 의한 대응으로 치장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러가 일어난 후 팔레스타인은 축제분위기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화면이 전세계 모든 가정의 TV에 비춰지며 잇글람 나라들에 대해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걸프전때의 화면으로 교묘하게 왜곡 보도하였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만약 그들이 환호하였다 하더라도 분명 미국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이번 비행기 테러와 같은 무차별 살상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사람들의 죽음이 정치적 관계에서 정당화되어질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이 군사적 강경 대응이라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 비행기 테러에 분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이유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또다른 폭력이 일어나는 것을 방조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걸프전 때 죽어간 이라크인들과 유혈사태로 죽어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중동의 문제를 평화와 협력으로 풀어 나갈려는 자세만 보였더라도 애초부터 이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협조하지 않으면, 적’, 이분법적 논리가 판치는 냉전시대의 편가르기도 아닐 터인데, 지금의 국제정세는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 또한, 미국의 편에 서서 ‘미국 테러 희생자 애도의 날’까지 선포해가며 보여주기 식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국익에 관계되는 문제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난감하기까지 하다.
선과 악의 관계에서 항상 미국을 선으로 볼 수만은 없으며 그렇다고 미국과 아랍의 어느 편이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TV와 신문에서 비추어주는 가슴 아픈 장면들만이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언제 미국 군산업체가 보복의 미명 아래 아랍 곳곳에 폭탄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미국 그들이 전 세계에 저지른 일을 생각한다면 이는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것이고 그 대가를 저 무고한 사람들이 치르고 있는 셈이다. 아직까지 부시 행정부는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들을 제외한 특정 국가, 특정 종교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강하고 그러므로 ‘옳고, 정당하다’는 논리는 또 다른 보복과 피를 부를 것임에 자명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도주의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테러의 배경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입장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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