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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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9.0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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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오신 포스텍 학생과 교수님들, 그리고 직원과 동문 및 내빈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함께 반가운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막중한 책임감과 강한 포부를 품고, 대한민국의 가장 도전적인 대학의 제9대 총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37년간 포스텍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앞으로 제2의 도약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지, 지역과 국가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지, 그리고 미래 세계에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포스텍이 설립된 1986년은 우리나라 대학들이 국가건설을 위한 인재를 공급하던 교육 기능에 중점을 두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점에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출범한 포스텍은 미래를 내다보는 탁월한 지도자, 포스코와 법인의 든든한 지원, 그리고 구성원들의 남다른 열정 속에서 단기간에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했고, 월드뱅크가 이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발간할 정도로까지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거의 눈부신 성과에 도취해 안주하기에는 우리 앞에 몰려오는 변화의 물결은 너무 거세고, 그 파도는 너무 높습니다. 국가적인 경제성장의 둔화와 급격한 인구 감소, 이로 인한 사회적 동력의 상실, 극심한 수도권 집중 현상 등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 특히 포스텍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대응과 분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취임식에 앞서 저는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학교 안 노벨동산을 혼자 거닐어 봤습니다. 박태준 설립이사장님과 김호길 초대총장님이 만약 이 자리에 다시 오신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정신을 요구하실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답은 어쩌면 현재 강당 앞 광장에 빈자리로 남아 있는, 최초의 한국인 노벨과학상 수상자 좌대에 담겨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노벨상이 기리고자 하는 가치는 단순한 학문적 성공이 아니라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곳에 발을 내딛는 모험가 정신입니다. 남들이 잘 닦아놓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레이서가 아니라, 우거진 밀림에 처음 발자국을 내는 개척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불모지에 세워진 포스코의 기업가정신과 포스텍의 건학이념을 되돌아보면 포스테키안의 DNA에는 쉬운 성공과 편한 안주의 유전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개척정신으로 새로 써나가야 할 교육과 연구, 사회적 기여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먼저, 일반적인 우리 한국 대학의 모습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대학들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였고 이제 세계적 수준에 이른 대학들도 상당수 생겼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간 일궈온 서구의 대학들이 완성한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학풍은 아직 우리 대학들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진리 자체를 추구하고 지적 호기심의 열망을 불태우기보다는 연구업적과 연구비에 더 관심을 보이고, 치열한 논쟁을 회피하며, 타 연구 분야와 연구자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보니 그 틈을 타서 학문적 분파주의와 영역 지키기, 위계질서와 관료주의, 그리고 학내정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포스텍은 이런 퇴행적 현실에서 누구보다 먼저 일어서서 ‘아카데미즘’이라는,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지키고자 하는, 그리고 지켜오고 있는 대학 본연의 최고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과 연구, 창업과 사회적 기여 등 대학의 모든 영역에서 지적 호기심과 앎에 대한 열망이 포스텍 가족들이 숨 쉬는 자유의 공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포스텍이 나아갈 방향과 키워낼 인재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래전 어떤 일간지에 ‘엄지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내용입니다. 우리 손의 엄지는 흔히 최고, 으뜸을 나타내는 만국 공통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엄지는 오히려 다른 손가락들보다 키도 작고 손바닥이 그 밑동을 받쳐주지도 않아 다섯 손가락을 펴 놓고 보면 사실 별 볼품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지가 어떻게 으뜸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나머지 네 손가락과 달리 엄지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동물의 네 발 중에서 영장류의 경우는 앞발을 손이라고 부릅니다. 발과 손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엄지의 방향입니다. 엄지가 나머지와 같은 방향이면 엄지발가락이 되고, 다른 방향이면 엄지손가락이 됩니다. 손과 발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발은 이동 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손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영장류가 손으로 물건을 쥐고 도구를 만들며 정교한 작업을 함으로써 만물의 ‘으뜸’이 된 배경에는 엄지의 엇갈린 방향이 있었습니다.

조직과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더는 다른 곳을 봐야 합니다. 리더가 다른 방향을 보지 못하면 그 집단은 손이 되지 못하고 발에 머무르게 됩니다. 우리 기성세대는 네 개의 손가락이 크기 경쟁을 하듯 유능한 인재를 최고의 목표로 키워내던 시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엄지처럼 다른 곳을 보는 인재를 키워야 하는 시대입니다. 포스텍이 키워낼 미래 인재들은 자신만의 방향으로 성장하여 다른 사람들이나 심지어 인공지능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육과 연구는 이러한 전제 위에서 포스텍만의 고유모델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포스텍만의 고유한 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안과 밖으로 열린 대학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고도 21세기 사회에서 물리적 거리와 지리적 환경을 탓하는 것은 안이한 변명일 것입니다. 포스텍의 학부생들은 졸업을 1년 앞둔 3학년 말에 대학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CES나 향후 스웨덴의 Nobel Week를 선택해 경험할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오프캠퍼스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 어디서든 시공간의 제약 없이 한 학기를 이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미래의 자기 모습을 미리 꿈꾸고 세계무대에서의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대학 생활이 되게 할 생각입니다. 포스텍의 대학원생들에게는 학문 후속세대를 위한 강력한 재정지원과 함께 해외 유수대학들과의 복수학위제나 공동학위제를 통해 색다른 연구환경과 문화에 접하고 시야를 넓히도록 할 계획입니다. 

교수님들 역시 오프캠퍼스 프로그램과 미니 연구년 제도를 이용하여 좀 더 자유로운 해외 학술 활동을 지원하는 동시에, 해외학자 단기 초빙 사업을 통해 국제학계에서의 활동을 강화하고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할 계획입니다. 아울러 교수님들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 최고의 위치에 걸맞은 존중과 예우를 강화할 생각입니다. 직원들 역시 단순한 행정업무 제공자가 아니라 대학발전의 중요한 핵심 자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과 자기개발 기회를 제공할 생각입니다. 이 모든 정책과 제도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 보편적 방향과 기준입니다. 포스텍은 세계를 향해 양방향으로 가장 열려있는 대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오신 포스텍 가족 여러분!

포스텍은 크기가 작고 역사가 짧은 대학입니다. 그러나 조직의 규모와 역사와 예산과 지리적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집단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와 자세입니다.

미국에 가면 주마다 자동차 번호판에 그 주를 상징하는 문구가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있던 보스턴이란 도시가 속한 매사추세츠주의 문구는 ‘The Spirit of America’, 즉 ‘미국의 정신’입니다. 미국이란 나라의 자유와 번영, 전통과 미래라는 가치가 태동한 곳에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과연 The Spirit of Korea를 나타내는 곳은 어디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광복 이후 현대국가 한국의 정신은 5천 년 역사의 척박한 토양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도전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상징하는 도시를 꼽는다면 저는 황무지에서 세계적인 기업과 세계적인 대학을 동시에 만들어낸 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설립 40주년을 바라보며 포스텍이 한국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에 서서 세계무대로 제2의 도약을 하고자 합니다.

문호 앙드레 지드가 남긴 말 중에 제가 특히 좋아하는 말이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해변이 눈에서 사라지는 것을 감당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새로운 바다를 발견할 수 없다. (Man cannot discover a new ocean unless he has the courage to lose sight of the shore.)”

이제 포스텍은 새로운 항해를 위해 그동안 익숙했던 부두를 떠날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도 있고 바람과 파도도 거셀 것입니다. 그러나 포스텍 가족 모두 한마음이 된다면 이번 항해가 끝날 때쯤 멋진 새 바다에 당도해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취임사를 마치며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최정우 이사장님과 재단 이사님들, 이강덕 포항시장님을 비롯한 내빈 여러분과 포스텍 가족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포스텍이 새로운 닻을 올리는 모습을 항구에서 지켜보시며, 많은 지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