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교수자의 어려움
초보 교수자의 어려움
  • 이종식 / 인문 조교수
  • 승인 2022.11.1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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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 박사 학위를 받고 포항 바다를 처음 마주했다. 언제 놀러 오면 물회와 과메기를 사겠다며 보스턴과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공수표를 날렸다. 짧은 방학은 금방 끝나버렸다. 곧 우리 포스테키안들에게 ‘한국과학기술사’와 ‘한국근현대사의 이해’라는 수업을 가르치기 위해 무은재기념관의 낯선 강의실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교육 경험이 일천한 내게 수십 개의 영롱한 눈동자는 자못 부담이 됐다. 그래도 내겐 나름대로 미리 생각해 둔 목표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무리한 부담을 지우지 않으며 그들의 전공 너머에도 꽤 흥미롭고 알 가치가 있는 넓은 세상이 있음을 느끼게 도와주는, 그런 교양 수업 혹은 과학기술학 부전공 수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듯한 목표도 초보 교수자의 미숙함을 가릴 수는 없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무엇보다 수업 시간 75분을 계획한 바대로 운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에 쫓기며 정신없이 수업을 마치기 일쑤였다. 호기롭게 어떤 사전 지식도 상정하지 않고 수업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으리라 과신했건만, “여기까지는 고등학교 때 배우셨죠”라든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따위의 말을 무신경하게 내뱉고는 혼자 지레 뜨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학습자의 상태와 의중을 헤아리는 것은 전적으로 교수자의 책임일 텐데, 그 책임을 회피하거나 학생들에게 전가하지 않고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기꺼이 애써보고 싶었다.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꽤 많은 포스테키안이 이른바 ‘의식의 흐름’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수업 내용이 기승전결의 맥락에서 이탈됐다고 느끼는 순간 학생들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꼴을 갖춘 이야기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연습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 학생들은 또한 추상적이고 규범적인 메시지에 끌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핏대 세우며 과학의 준엄함이나 올바른 역사관의 숭고함을 떠들어 대기보다는, 학계에서 두루 합의된 사실들을 다소 건조하게 소개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대신 학생들이 몇몇 사실들에 대해 잘 몰랐거나 무관심했음을 굳이 자책하지 않을 수 있는, 또 그런 사실들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이 묵살당하는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강의실의 ‘톤과 매너’를 고민하게 됐다.

개강 후 6주 차의 진도를 소화했을 무렵, 문득 학생들은 정말 귀신같다고 생각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과 표정으로, 심지어 마스크에 반쯤 가려진 그 나머지 얼굴의 면적만으로 본인들이 들을 만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느끼는지, 몰랐던 신기한 사실을 알게 돼 재미있다고 느끼는지, 무언가 유의미한 통찰을 스스로 깨우쳤는지 다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았다. 학생들은 내 이야기와 연결되지 못할 때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감는다. 그들의 신남이 나의 신남과 공명할 때에는 눈을 맞추며 빛낸다.

돌이켜 보면 내 삶에는 매 순간 모든 내용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더러 계셨다. 초보 교수자인 내게 그런 경지는 언감생심이다. 하여 우리 학생들이 수업 시간 내내 시종일관 내게 눈을 빛내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포스테키안들이 이번 학기를 모두 마치고 효자시장에서, 세월이 더 흘러 회사나 연구실 티타임 중에, 유학 중인 해외의 어딘가에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눈을 빛내며 우리대학에서의 화양연화를 추억하는 데에, 더 나아가 아마도 녹록지 않은 일생을 뜻있게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수업이 어떤 것인지 나는 계속 어렵게 어렵게 헤매보려 한다. 초보 교수자의 어려움은 어쩌면 마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