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민주화
기술의 민주화
  • 장수영 / 산경 교수
  • 승인 2022.09.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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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는 오즈의 마법사가 가진 마법을 사용해 고향 캔자스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대해 보였던 마법사의 실체는 늙은 공학자였음이 폭로되고, 공학자가 오랫동안 만들었다는 열기구를 함께 타려 했지만, 이마저 타지 못하게 된 도로시는 크게 낙심한다. 이런 도로시에게 착한 마녀는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이미 도로시 안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내 집같이 좋은 곳은 없어”라고 말하며 발뒤꿈치를 마주치는 간단한 행동을 통해 도로시가 고향으로 귀환하며 이 동화는 끝난다.

오즈 사람들이 공학자가 만든 기술의 산물을 마법이라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다. 공상과학 영화의 효시로 불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원작자 아서 C. 클라크는 “앞서가는 기술은 마술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생각해 보면 많은 혁신적 기술들이 처음엔 초자연적 마술의 모습으로 등장해 우리를 매혹하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 듯 군림한다. 그러다 점차 많은 사람에게 과학적 원리가 폭로되거나 이해돼 기술의 지위는 낮아져 상식이 된다. 기술 혁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기술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기술의 발전이 자유를 크게 제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소설들에 담긴 경고와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서 절대 권력의 압제적 통제로 드러나는 기술은 기술 결정론적 비관에 다소 치우쳐 있다. 아마 오웰과 헉슬리는 이제 막 마술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던 현대 과학기술의 모습에서 소설적 영감을 얻었기에 훗날 기술의 민주화를 거친 측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대중의 손에 들어간 정보 기술은 매우 다양한 민주화 양상을 만들어낸다. 대형 발전소나 송전 시설 없이 소규모 재생 에너지 발전기를 이용해 개인이 전기를 만들어 쓸 수 있게 된 것은 전기의 민주화다. 대자본을 가진 금융 기관 없이 크라우드 펀딩과 P2P(Peer to Peer) 기반의 핀테크를 통해 개인이 금융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금융의 민주화다. 대형 건물과 다수의 점원 없이도 알리바바처럼 쇼핑몰을 만들 수 있게 됐고, 큰 규모의 숙박시설을 소유하지 않아도 에어비앤비와 같이 숙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국가와 조폐공사와 같은 엄청난 기반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화폐 발행이 이젠 컴퓨터를 소유한 사람들이 모여 문자 메시지나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가능한 시대가 됐다. 이렇듯 개개인의 손에 들어가 힘이 된 현대 기술은 경제, 언론, 정치를 아우르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대중에게 권력을 나눠주는 민주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적 민주화 과정을 돌아보면, 민주화 자체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 해결의 종착역은 결코 아니다. 과거 암울했던 정치 상황에서 오직 민주화의 봄바람만 불어온다면 모든 정치적 문제는 눈 녹듯 사라질 것으로 생각됐다. 하지만 지금도 끊이지 않는 정치적 혼란과 위기를 보면 민주화는 목적지가 아니라 새로운 여정의 첫 발자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0년 전 사람들의 눈에 현대인들은 모두 위대한 마술사와 같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손에 들린 것은 기술의 산물이고 이에 따라 강화된 개개인의 역량이 열어내는 기술의 민주화 시대의 가능성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넘어선다. 유무선 통신 기술로 더욱 긴밀하게 연결돼 온갖 지식과 정보를 나누게 될 우리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공동체와 경제를 건설하고 효율적인 정치적 의사 결정 구조를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새로운 모습의 국가를 형성할 수도 있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저런 일을 감행하는 경박스러움은 경계해야 한다. 민주화된 현대 과학기술이 열어주는 가능성이 크고 놀라운 만큼, 우리는 모든 역량을 이용해 어떤 내일로 나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물어보고 답하며, 신중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어찌 쉬운 답이 있겠는가? 그저 도로시의 소망처럼 오랫동안 잃어버리거나 잊고 있었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내 집 같은 곳은 없어”라는 다짐이 어쩌면 이 모든 어려운 질문에 대한 소중한 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