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IMF 3년의 교훈 혹독한 시련도 물리쳤던 초심이 아쉽다
[시론] IMF 3년의 교훈 혹독한 시련도 물리쳤던 초심이 아쉽다
  • 김정곤 / 한국일보 경제부 기자
  • 승인 2000.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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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인근 지하도에 다시 노숙자가 늘고 있다. 연말까지 60만명이 추가로 실업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란 통계도 나왔다. 상여금과 물품대금 등 자금수요가 몰리는 연말을 맞아 기업체 자금담당 직원들은 돈이 말라 비틀어진 게 아니냐고 아우성이다. 은행이나 종금사, 투신권 등 제도권 금융기관은 물론 사채시장까지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 기업들의 회사채를 취급하지 않은 지는 이미 오래됐다.

1997년 11월 21일 한국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하고 12월 3일 승인이 떨어지면서 시작된 IMF체제. 그러나 IMF 신탁통치가 출범한 지 꼭 3년 만에 경기침체, 증시하락, 환율급등, 실업증가 등 IMF망령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국경제에 다시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당리당략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태(舊態)를 거듭하고 곳곳에서 노사갈등이 분출되면서 기업겚鳧?구조조정이 지연되는 등 난국타개의 실마리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과연 IMF 3년차 증후군을 겪었던 남미의 전철을 되풀이하면서 국민들은 또다시 혹독한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가. 주식회사 코리아가 또한번 회생과 퇴출의 심판대에 올라 시련을 맞고 있다.

위기의 실체는 보다 심각하다

한국정부는 올해 8월 IMF의 구제금융을 모두 청산함으로써 IMF관리체제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다. S&P(스탠다드 앤드 푸어스)나 무디스 등 세계 유수의 신용평가기관에서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조정했고 각국 언론들도 앞다투어 한국을 IMF모범국으로 추켜세웠다. IMF가 처방한 구조조정과 저금리정책을 훌륭하게 적용한 덕분에 독자생존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국제적 평가였다.

실제 경제지표에서 상당한 호전세가 확인된 것도 사실이다. IMF체제로 진입하던 당시 56억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고는 3년 만에 900억달러 이상으로 늘어났고 무역수지도 81억달러 적자에서 지난해 250억달러 흑자로 돌아서 수출경쟁력을 상당히 회복했다. 천정부지로 치솟아 한때 각각 2,000원과 30%를 웃돌던 환율과 금리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에 따라 경제성장률은 1998년 마이너스6.7%에서 지난해 10.7%로 올라간 데 이어 올해도 9%는 무난히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정이 180도로 돌변한 것일까. 1,000포인트를 넘나들던 종합주가지수가 곤두박질치더니 IMF구제금융을 신청하던 3년 전의 500대로 주저앉았고 성장률도 뚝 떨어져 경기둔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장과 금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는 꼭꼭 막혀 버렸고 설비투자는 엄두도 못내고 있다. 환율도 덩달아 치솟아 1년여 만에 최고치를 계속 갈아치우는 중이다.

원화약세, 주가불안, 경기하강 등 위기양상이 3년 전과 닮은 꼴로 진행되고 있다. 구조조정에 반발하고 있는 공기업, 은행, 퇴출기업의 파업움직임도 기아사태를 재판(再版)처럼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경제마저 경착륙(hard landing) 기미를 보이고 있으며 국제유가의 고공행진, 아사아권의 환란움직임 등 외부여건도 심상치 않다.

경제위기는 반복된다?

IMF로부터 긴급자금을 지원받은 국가들이 3년을 못넘기고 재차 환란에 휩싸이는 현상을 IMF 3년차 증후군으로 표현한다. 1994년 IMF체제에 들어가 강도높은 경제개혁으로 아시아국가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던 멕시코가 3년 후인 1998년부터 다시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다. 정치논리의 지배와 금융시스템에 대한 불충분한 수술, 스스로의 자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정부나 민간전문가를 막론하고 현재 우리의 위기상황을 3년차 증후군으로 분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위기극복 과정에서 금물(禁物)로 알려진 자만이 위기를 불렀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IMF체제 이후 정부와 국민은 뼈를 깎는듯한 고통을 감수해 왔다. 1998년 한해동안만 55개 기업이 퇴출리스트에 올라 법정관리와 워크아웃으로 전락했으며 부실기업에 무책임하게 자금을 내줬던 은행들도 5개나 문을 닫고 5개는 통폐합되는 비참한 운명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명이 실업자로 길거리에 내몰려 IMF체제가 막바지에 이른 1999년 초에는 실업자수 178만명, 실업률 7.8%라는 미증유의 기록을 나았다. 서민들은 장롱 속의 반지를 들고나와 신국채보상운동의 대열에 동참하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구조조정의 성과는 지난해부터 급격히 지표경제에 반영되었고 개혁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넣기에 충분했다. 세계적인 벤처열기와 함께 산업자본, 금융자본 가릴 것 없이 경기를 선반영한 증시로 몰려들어 시장을 폭발시켰고 과소비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올해 3월이후 현대위기설과 4월 총선을 거치면서 거품이 순식간에 빠졌고 구조조정은 또다시 실종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상황이 다소 개선되자 위기상황을 망각한 자만심이 다시 위기를 재촉한 꼴이 됐다.

중단없는 개혁이 필요하다

정부조차 내년 상반기에 성장 물가 고용 등에 있어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고 실토할정도로 최악을 가정한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바꿀 시스템은 거의 작동을 않고 있다. 수조원씩의 채권전용펀드가 나와도 우량채권 외에는 거의 거래가 없고 갖가지 시장부양책을 내놔도 증시는 움직일 생각도 않는다. 시장에서 그만큼 정부가 신뢰를 잃어버린 때문이다. 시스템의 정상가동을 위해선 무엇보다 정부가 신뢰를 회복할 방안을 찾는 게 급선무가 됐다.

2차 기업구조조정이 마무리된 데 이어 금융권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중이다. 전문가들도 중단없는 개혁만이 위기를 극복하는 지름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내년 2월말까지 공공겚蓚?금융겞逾?등 4대부문의 개혁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노동개혁은 쉽지가 않다. 공공노조를 시작으로 파업움직임이 현실화하고 있다. 정부는 개혁을 대의(大義)삼아 노동계의 희생만을 강요할 수 없는 형편이다. 기업주든 금융가든 부실책임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추궁하는 개혁의 형평성이라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이미 시장의 신뢰가 바닥인 마당에 원칙마저 없다면 누구도 개혁을 따르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