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의 역할을 다시 생각할 때다
최근 기초과학연구소 산하 연구단장으로 우리대학과 카이스트 등의 대학교수들이 대거 선임됐다. 이는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 연구에 있어 대학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이다. 선임된 연구단장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나라의 연구를 선도하는 저명한 과학자들로서, 각 분야마다 연간 100억 원 규모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기초과학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우리대학 교수 중에서 4개 분야의 연구단장이 선정된 것은 우리의 경사이다. 이를 기회로 대학의 연구가 보다 활발해지고, 강조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대학의 연구 기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우리대학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연구중심대학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1986년 개교하였다. 이때까지 우리나라의 대학에서는 이미 밝혀진 지식들을 학습 전파하는 강의 위주 교육이 주로 시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1970년대 이래의 경제 발전에 걸맞은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해서 대학이 독자적인 지식을 탐구하고 그 결과를 기반으로 하여 교육을 발전시키고 사회에 기여할 것이 요청되고 있었다. 고 박태준 설립이사장과 고 김호길 초대 총장은 이러한 국가적, 사회적 당위성을 누구보다 먼저 절실히 인식하고 이에 부응하기 위하여 연구중심대학으로서 우리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우리대학의 설립 후 4반 세기가 지난 현재, 수많은 대학들과 정부의 정책들에서 ‘연구중심대학’이라는 개념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중요하게 통용되고 있다.
대학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요청 받아 설립됐다. 르네상스 시대에 즈음하여 생겨난 최초의 대학인 이태리 볼로냐 대학은 법관, 의사 등 고급 직업인의 양성을 최우선 목표로 했다. 그 이후 영국은 교양을 갖춘 상류 지도자 교육을, 프랑스는 다양한 전문직에 필요한 심화된 능력을 지닌 전문인재 양성을, 독일은 학문탐구 결과에 의한 사회 기여를 대학의 기본 성격으로 삼았다. 독일의 새로운 대학 개념에 따라 19세기 초 설립된 베를린 대학은 현대적 연구중심대학의 모태가 됐다. 미국은 초기에는 영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추후 여러 나라의 모델들을 수용하여 현재의 복합적 성격을 지닌 대학 모습에 이르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의 성균관은 영국의 대학과 흡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대학의 최우선 존재 가치는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인재의 양성에 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요즈음 사회는 대학에 인재 양성뿐 아니라, 지식과 기술의 연구 개발을 매우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대학의 역할에 대해 합의되지 못한 이념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연구 규모와 논문 발표 실적이라는 평가 잣대에 얽매여 대학과 교수 활동에서 연구의 비중이 지나칠 정도로 높다고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급기야는 많은 대학에서 대학 본연의 역할인 인재 양성의 중요성이 간과되기까지 한다. 과연 대학과 교수의 역할에서 연구, 그 자체가 지금처럼 강조되는 것이 적절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시대적 환경에 따라 대학의 비전과 이념은 적절하게 바뀌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의 여타 조직과 달리, 대학은 수백 년을 살아가는 나무와 같다. 나무는 세월에 따라 새 옷을 갈아 입되 죽은 것을 감싸고, 죽은 것은 새 옷을 지탱하여 공존함으로써 수백 년을 살아간다(김훈 ‘내 젊은 날의 숲’에서). 그렇지 않으면 대학도 문을 닫아야 할 경우가 생긴다. 위에서 살펴본 역사적 사실들 또한, 대학의 겉모습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대적, 사회적 필요성에 따라 규정되고 변화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견지되어야 할 것은, 사회 특히 미래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미리 연구하고, 시험하고, 확립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인재를 준비시켜야 하며, 이를 위한 현명한 선택 기준과 방법(본지 5-2호 사설)을 대학이 마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학이 대비해야 할 21세기의 모습은 명확하지 않다. 20세기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다원적 상대성 개념과 함께 출발하였다. 세기 초반의 개념 정립을 거쳐, 후반에 나타난 실용 및 산업화의 발전 속도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급격하였다. 21세기를 견인할 개념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지금 21세기 초는 디지털 정보와 지식들이 엄청난 속도로 분출되고 있다. 따라서, 밝혀진 지식들마저 흡수, 전파하는 데 한계에 달했으며, 오늘 연구하고 교육한 것들이 내일에는 쓰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우리대학은 4반 세기 전에 제시한 모습으로, 이제까지 그러하였듯이, 미래에도 우리나라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있어 다른 대학들을 선도할 수 있을까? 과연 이 상황에서 우리의 대학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인가?
지금은 대학 구성원 모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의견을 나눌 때이다. 새 시대에 맞는 대학의 역할을 생각하고, 합의하고, 이를 꾸준히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대학 이외에는 이러한 모험을 할 수 있는 대학이 한국에는 없다고 여겨진다. 함께 고민하는 구성원들이 많을 때, 우리대학은 21세기에도 한국 대학 교육의 새 장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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