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계단] 경시대회의 추억
[78계단] 경시대회의 추억
  • 황정은 기자
  • 승인 2003.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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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대가 “경시대회가 사교육비 지출을 늘리고 일부 지역 수험생에게만 유리하다는 지적에 따라 올해부터 전국 중ㆍ고등학생 국어 경시대회를 열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고려대에서는 논술과 과학 경시대회를 올해부터, 연세대에서는 정보, 수학, 과학 경시대회를 2004년부터 폐지하기로 했다. 그동안 남발되어 온 온갖 경시대회들을 소위 한국의 3대 명문대학이라는 세 대학이 앞장서서 폐지하기로 했다니 환영할만한 일이다.

대학 입시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하지 않을까 해서 온갖 경시대회의 메달들을 사냥하러 다녔고 그 사냥에서의 성공으로 대학 입시 티켓을 따낸 나와 몇몇 친구들은 작금의 경시대회 과열 현상의 직접적인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다.

내가 과열된 경시대회 열기에 뛰어든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동네 학원에서는 추가로 돈을 내고 경시대회 준비반에 들라고 설득했다. 경시대회에서 입상을 하면 과학고에 갈 수 있고, 과학고는 일류대학으로 가는 발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철모르는 중학생들은 무거운 학원 등록금과 무거운 가방, 늦은 귀가시간을 감수하면서 경시대회를 준비했다. 그 연령대가 초등학생으로까지 낮아진 것이 최근의 경시대회 대비 사교육의 현실이다.

과학고 입학 후에는 비교내신제 폐지와 널뛰기 수능으로 지극히 불안했던 대학 입시 전선을 뚫고 일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경시대회 출전권을 향한 경쟁이 벌어졌다. 대회에 출전하는 대표들에게는 문제를 몰래 적어 오라는 ‘특명’이 떨어졌고 교사들은 이것으로 소위 ‘족보’를 만들었다. 이 족보는 경쟁 학교에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비밀 문서였고 가끔 경시대회 전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졸업생들이 경시대회 입상으로 대학 입시 티켓을 따고자 하는 ‘있는 집 자식들’에게 고액 과외를 해주면서 고가에 판매되기도 했다. 이것이 경시대회가 학교 간, 계층 간 격차와 갈등을 조장하는 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생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만난 서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겪은 것은 소위 ‘새발의 피’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과외는 못 받고 학원만 다닌다는 그 친구는 한 달에 학원 등록금으로 100만원 가량을 지출하며, 그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라고 말했다. 당시 내가 살던 부산에는 고교생 경시대회를 준비해주는 학원이나 과외는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대부분 독학과 그룹스터디로 경시대회를 준비했는데, 수도권 지역에서는 대부분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지 않으면 경쟁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지역간 사교육 수준의 차이가 지역간 경시대회 입상자 수의 차이를 만들었다.

경시대회의 취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학생들을 발굴하는 것이고 국제 올림피아드에 출전할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수학, 과학, 정보 경시대회는 10여년 동안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으며 국위 선양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위해서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비롯한 실속 있는 몇몇 경시대회 만으로도 충분하다. 학벌을 향한 과도한 경쟁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대학 입시의 특별 케이스였던 경시대회 입상이 갑자기 열폭풍의 핵이 된 것은 수능을 비롯한 대학 입시의 다른 통로들이 제 역할을 못하게 되고 학생과 학부모들을 불안감에 휩싸이게 하면서부터이다. 그러면서 경시대회를 통한 재능있는 인재 발굴에는 관심도 없었던 몇몇 굶주린(?) 사학들이 경시대회 사업에서 돈냄새를 맡고는 좁은 시험장에 대책없이 많은 참가자를 몰아넣고 최소한의 신중함도 기울이지 않은 졸속 출제와 채점으로 전형료 수익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령 회사들이 이름조차 생소한 온갖 경시대회를 실시하여 전형료를 챙기고 대학 입시에 반영된다는 사기극을 벌였다. 이제 경시대회 시장은 커졌고 경시대회 종목도 기존의 수학, 과학 위주에서 논술, 외국어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거품으로 가득찬 경시대회 시장으로 인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남발된 경시대회는 퇴출되어야 한다. 인재 발굴이라는 기본 취지에 충실히, 대회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전형료는 받더라도 수익을 내겠다는 의도로 수험장을 콩나물시루로 만들며 턱없이 많은 전형료를 받아내는 경시대회는 사라져야 한다. 또, 사교육 수준의 격차로 인한 계층간 갈등과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려면 사교육으로 ‘만들어진’ 가짜 영재들 틈에서 그 분야를 좋아하고 탁월한 재능이 있는 진짜 영재를 선별해낼 수 있는 변별력 있는 문제를 출제해야한다. 그리고 사교육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예전 출제문제가 반복 출제되기 때문이므로 ‘족보’는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할 역량이 못 되는 대학이라면 경시대회를 주최해서는 안 된다.

근래의 교육시장, 특히 대학 입시와 관련된 사교육 시장은 날이 갈수록 천민 자본주의의 성향을 강하게 띠어 가고 있다. 최근의 경시대회 과열은 우리 교육계의 고질적 문제들과 더불어 이러한 현상의 한 단면에 다름아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일부 경시대회 폐지가 앞으로 남발된 경시대회 폐지의 신호탄이 되기를, 그리고 나아가 대학 입시의 건전화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