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폰을 끼고 있는 동안에는 모른다. 소음이 사라진 건지, 소음을 듣지 않도록 선택한 건지. 그 구분이 흐릿해질 때쯤에는 귀보다 판단이 먼저 둔해진다.
노이즈 캔슬링이 만드는 무음은 끊임없는 연산의 결과다. 파동을 덮기 위한 기계의 적극적인 간섭이다. 소거된 세계가 주는 매끄러운 안락감이 되려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 이어폰을 뺀다. 연산이 멈춘 자리에는 불규칙한 마찰음, 일상의 소음이 들이닥친다. 다듬어지지 않은 변수들은 명백히 피로를 유발한다. 그럼에도 고립된 환상 속에 머무는 것보다 통제 불가능한 소음과 직접 부딪히는 쪽이 세계를 감각하는 더 정직한 방식이다.
소리의 층위를 고르게 압축하는 알고리즘은 효율적이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원음에 있던 결의 틈, 불완전한 여백까지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의 문법도 종종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현상을 활자로 옮기는 과정에는 빈번히 마찰을 소거하려는 서사의 관성이 개입한다. 가독성을 앞세워 중층적 이해관계를 평탄화하고, 명쾌한 결론을 위해 껄끄러운 맥락을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식이다.
단차가 지워진 문장들은 일말의 충돌조차 겪지 않으며 지면 위를 매끄럽게 활주한다. 깔끔한 인과율로 수렴하는 구조는 읽는 이에게 달콤한 지적 안도감을 허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락함을 위해 타협한 텍스트는 현실의 기록이 될 수 없으며, 정교하게 세공된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활자화가 필연적 덜어냄을 수반한다면, 기사를 쓴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남길 것인가’보다 ‘무엇을 지우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에 가깝다. 해소되지 않는 긴장을 억지로 마무리 짓지 않는 것.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설명된 것처럼 봉합하지 않는 것. 그 소극적 엄밀함이 지금 내가 지킬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다짐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