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핀으로 피운 위상 초전도체 구현의 꿈
그래핀으로 피운 위상 초전도체 구현의 꿈
  • 최영준 / 물리 조교수
  • 승인 2026.03.2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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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물질은 대게 전기적 성질이 비교적 분명하다. 유리나 나무처럼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 부도체, 구리나 철처럼 전기가 잘 흐르는 도체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인류는 이 둘 사이를 쉽게 조절할 수 있는 물질, 즉 반도체를 활용해 컴퓨터 혁명을 이뤘다. 트랜지스터는 게이트 전압을 이용해 반도체 구조물의 전도 상태를 조절하는 스위치 역할을 해 오늘날 모든 전자기기의 핵심이 됐다. 이런 점에서 우린 흔히 석기·청동기·철기에 이어 ‘실리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단지 도체와 부도체 사이를 오가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혁명이 가능했다면, △초전도체 △자성체 △위상 물질(Topological material, 표면과 내부의 물리적 특성이 다른 물질)처럼 훨씬 더 다채로운 양자 물질 상태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면 또 어떤 미래가 열릴까?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그래핀 다중층

이 상상을 현실로 바꿀 가능성을 보여준 물질이 있다. 그것도 복잡한 화합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원소인 탄소로만 이뤄진 물질, 바로 그래핀이다. 원자 한 층 두께의 그래핀 한 장만 놓고 보면, 게이트 전압으로 전자의 수를 조절할 수는 있어도, 금속이라는 성질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그래핀을 두 장 이상 ‘특정한 방식’으로 쌓았을 때다. 그래핀 두 층을 서로 약 1도 정도 비틀어 쌓는 ‘비틀린 이중층 그래핀’, 혹은 그래핀 세 층을 계단식의 마름모꼴 배열로 쌓는 구조에서는 전자의 운동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게 쌓인 다중층 그래핀에서는 전자의 밴드 구조가 매우 평탄해져, 전자들의 운동에너지가 크게 줄어든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전자들 사이의 쿨롱 상호작용이 더 중요해진다. 다시 말해, 전자들이 서로를 거의 독립적으로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강하게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이런 상태를 ‘강상관계(Strongly correlated system)’라고 부른다.

원래 강상관계 현상은 구리계 고온 초전도체처럼 원자 종류가 많고 구조가 복잡한 물질에서 주로 관찰됐다. 그런데 그래핀처럼 단순한 탄소 원자층을 어떻게 쌓는지만으로 강상관계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물질과학에 큰 충격을 줬다. 더 나아가, 그래핀의 쉬운 조절성이 장점으로 결합되면서 강상관 상호작용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초전도 상태 △모트 절연체(Mott insulator, 띠 이론상 도체지만 전자간 상호작용으로 인해 절연체로 측정되는 물질) 상태 △자성 상태 △위상 상태 등의 강상관 현상들을 하나의 물질에서 스위치만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됐다.

▲초전도상태와 위상 상태 조절을 표현한 모식도(출처: ChatGPT로 제작)
▲초전도상태와 위상 상태 조절을 표현한 모식도(출처: ChatGPT로 제작)

위상 초전도체, 새로운 큐비트 될까

그렇다면 이런 물질 조절 능력은 어떤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가장 주목받는 가능성 중 하나는 초전도체와 위상 물질의 결합, 그리고 그 결과로 기대되는 ‘위상 초전도체(Topological superconductors)’의 구현이다. 이론적으로 위상 초전도체는 마요라나 준입자(Majorana quasiparticle)와 같은 매우 특별한 양자 상태를 품을 수 있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이 상태는 외부 잡음에 강인해, 양자 정보를 안정적으로 저장하고 조작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큐비트(Qubit, 양자 정보의 단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큐비트 플랫폼들은 외부 환경의 작은 교란에도 양자 상태가 쉽게 깨지는 문제가 있지만, 마요라나 준입자 큐비트를 이용할 수 있다면, 보다 안정적이고 오류에 강한 큐비트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크다.

현재까지 위상 초전도체를 실험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사용한 대표적인 방법은 서로 다른 초전도체와 위상 물질을 인공적으로 접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에서는 두 물질의 경계면에서 성질이 완전히 이상적으로 섞이지 않아, 이론에서 기대한 상태를 구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 강상관계 그래핀 기반 시스템에서는 하나의 재료 플랫폼 안에서 초전도성과 위상성을 모두 조절할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두 재료를 억지로 붙이는 대신, 하나의 물질 안에서 필요한 양자 상태를 연속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위상 초전도 구현에 매우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주사 터널링 현미경으로 본 비틀린 이중층 그래핀 (scale bar: 2nm)
▲주사 터널링 현미경으로 본 비틀린 이중층 그래핀 (scale bar: 2nm)

양자수송 이미징 실험실의 연구

우리 실험실은 이런 가능성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그래핀의 여러 양자 물성을 조절하고 서로 결합시키며,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물리 현상을 들여다보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사용하는 핵심 방법이 바로 주사 터널링 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e, STM)과 양자수송 측정을 결합한 새로운 실험 접근이다. 기존에는 주사 터널링 현미경을 통해 원자 수준에서의 국소적인 전자 상태를 관찰하거나, 양자수송 측정을 통해 소자 전체에서 나타나는 거시적인 전기적 특성을 측정하는 식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두 방법이 분리돼 있으면, 소자 안의 매우 좁은 영역에서 어떤 미시적 현상이 일어나고 그것이 전체 수송 신호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직접 연결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위상 초전도 구현에서는 초전도성과 위상성이 만나는 아주 얇은 경계 영역이 결정적이다. 양자수송 측정만으로는 그 작은 구역에서 실제로 어떤 전자 상태가 형성되는지 알기 어렵고, 반대로 주사 터널링 현미경만으로는 그것이 소자 전체의 전기적 응답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측정을 결합하면, 국소적인 물리와 거시적인 신호를 하나의 그림으로 엮어낼 수 있다. 즉, 특정 영역에서 나타나는 전자 상태의 변화가 실제 수송 특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동시에 추적할 수 있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실험적 이해가 가능해진다.

새로운 실험적 기술에, 전에 없었던 마법처럼 조절할 수 있는 물질, 그리고 각 요소에서 세계적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대학의 뛰어난 연구자들과의 협력까지. 그래핀을 이용해 위상 초전도를 구현하려는 발걸음은 기초과학의 흥미로운 발견을 넘어, 미래 양자 기술의 핵심 기반을 만들어가는 도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