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특정 분야에서 깊이 있는 지식과 경험을 쌓은 사람을 전문가라 부른다. 과거에는 대학의 전공을 세분화해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방식이 자연스러운 경로로 여겨졌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면서, 단일 분야의 전문성을 넘어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융합형 전문가’의 필요성이 떠오르고 있다. 우리대학의 복수전공·부전공 제도를 장려하는 융합학부나 새내기들에게 자유로운 전공 선택의 기회를 주는 무은재학부 역시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발맞춘 것이다. 내가 몸담은 생명과학 분야만 해도 생명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물리 △화학 △수학 △화학공학 △기계공학 △컴퓨터공학 등의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 생명체는 단일 학문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 즉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릇은 하나의 용도만 수행하지만, 군자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배우고 변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오늘의 교육과 연구 환경에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중요한 지침이 된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자신의 역량을 미리 제한하지 않는 태도, 실패 가능성이 있더라도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마음가짐이 바로 군자불기의 핵심이다. 학문이라는 길은 본질적으로 탐색과 도약의 연속이며,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 진보가 시작된다.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은 종종 “저는 이 과목이 약해서…”, “실험이 자신 없어서…”, “데이터 분석은 저와 맞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자신을 특정 기능만 수행하는 ‘기(器)’로 고정하는 태도다.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지, 배우면 익힐 수 있고, 연습하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교육자의 역할은 학생이 스스로 설정한 한계를 깨고, ‘가능성의 대상’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돕는 데 있다. 배움의 역량은 고정된 능력이 아니라 확장 가능한 잠재력이기 때문이다.
연구 현장 또한 다르지 않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거나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의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일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실패의 위험을 이유로 시도 자체를 피한다면 연구자의 성장은 멈춘다. 과학과 기술이 빠르게 융합되는 시대에 하나의 기능만 고집하는 연구자는 결국 혁신의 흐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군자불기는 연구자가 이런 ‘기능적 안전지대’를 벗어나 다양한 지식과 기술, 새로운 질문과 가설을 과감히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낯선 분야라도 읽어보고, 다뤄보지 않은 데이터 분석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기존 패러다임에 질문을 던지는 작은 용기에서 새로운 발견이 탄생한다.
교육과 연구의 공통점은 결국 ‘확장의 과정’이라는 데 있다. 학생은 배우며 시야를 넓히고, 연구자는 새로운 질문을 통해 지식의 경계를 넓힌다. 그 출발점은 “나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자각이다. 하나의 기능으로만 규정될 필요가 없으며, 스스로 선택한 방향으로 성장하는 존재가 바로 오늘의 군자다. 군자불기는 우리에게 두려움보다 호기심을, 편안함보다 성장을, 익숙함보다 도전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삶의 어느 순간, 정해진 역할에 익숙해지며 ‘그릇’처럼 안주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학문과 교육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변화하는 세계 속 미래형 전문가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모양으로 다시 빚어질 수 있는 존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유연함, 그리고 그 유연함을 실천하는 용기다. 군자불기의 철학이 오늘의 교육과 연구 현장에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스로를 규정하지 말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말자. 자신의 가능성을 그릇처럼 제한하지 않을 때, 비로소 새로운 지식과 발견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 글을 통해 군자불기의 마음가짐을 공유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는, 박사후 연구원 과정을 마치던 날 지도교수님께서 남긴 조언, “더 유연해져라”라는 말이 지금도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건네진 그 말은 스스로를 하나의 틀에 가두지 말라는 메시지로 다가왔고, 이후 불기(不器)의 태도, 유연함과 도전은 나의 연구와 교육 철학을 움직이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