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대는 잔향마저 스러진다.
상대가 분명한 시대가 있었다. 전후(戰後) 세대에게는 배고픔이 상대였고 물질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민주화 세대에게는 정부가 상대였다. “그때는 문제가 분명했고 싸울 대상이 있었다. 민주화든 무엇이든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지금의 문제는 그 희망이 없어졌다는 것이다”라고 영화감독 이창동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말한다. 우리 세대의 링 위에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각자 저만의 링 위에서 치열하게 스텝을 밟고 있는 고적한 복서의 세대요, 상실의 시대다.
상실의 시대라는 단어의 어감이 지나치게 비관적일 수도 있지만, 상실의 시대란 다시 말하면 창조의 시간이다. 열매가 떨어지고 그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나듯이, 긴 밤 끝에 여명이 밝아 오듯이 상실은 창조를 잉태하고 있다. 그리고 상실의 시대가 내미는 창조의 과제는 언제나 그 시대 젊음의 몫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한국 번안: ‘상실의 시대’)이라는 소설을 통해 일본에서 전쟁이라는 거대하고도 파괴적인 가치가 소실된 뒤 상실의 시대에 사는 젊음을 그려 보인다. 소설에서 하루키는 창조의 방법을 제시하기보다는 창조의 방향을 짚어 보고 그 이후의 것은 독자에게 맡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 쓰인 문장이다. 창조를 위한 첫 번째 물음은 자기 내면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정해진 가치에 매몰된 삶이 아닌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면을 성실히 두드려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처한 현실은 창조가 아닌 ‘맹목적 생산’만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까지는 점수만이 있었고 미래에는 액수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경쟁은 뜨거워지고 사랑은 식어 간다. 노동은 창조의 과정이 아니라 생산의 수단에 불과해지고 있다. 알베르 카뮈는 “노동자에게 창조자의 존엄성을 되돌려 줌으로써만, 즉 노동의 생산품 못지않게 노동 자체에 대해서도 기울이고 성찰함으로써만 문명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책 ‘반항하는 인간’에서 말한다. 이쯤에서 자문(自問)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난 시대는 잔향마저 스러진다. 상대는 오지 않는 링 위, 이제는 링 밖으로 난 길이 보인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창조자의 희미한 실루엣이 보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