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 없는 사회와 함께할 때, 과학기술은 미래가 된다
배제 없는 사회와 함께할 때, 과학기술은 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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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5.09.0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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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개인 비행기로 이동하고, 고래가 잠수정을 끈다.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해 영상화하고, 건설 현장에서는 기계가 무거운 물체를 옮긴다. 이는 모두 1900년대에 활동했던 프랑스 예술가 장 마크 코테가 2000년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들에 등장한 장면들이다. 작품 속에는 비현실적인 상상도 있었지만, 21세기 현재의 기술과 놀라울 만큼 유사한 부분도 많다. 100년 전 사람들이 꿈꾸던 기술이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과학과 기술도 머지않아 현실이 될 수 있으며, 아직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기술 또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미래를 향한 기대와 호기심이 커지는 이때, 반드시 던져야 할 물음이 있다. 미래 과학과 기술은 누가 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과학과 기술의 공공성을 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혜택을 실제로 누릴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 미래에 포함될 수 있는지를 묻는 문제다. 역사 속에서도 비슷한 질문은 반복됐다. 조선 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의병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이 질문을 받은 양반 출신 의병은 답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곧 조선을 지키려 한 자신의 대의가 모순됐음을 깨닫는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귀한 조국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억압적인 사회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 조선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 옳았던가.

우리도 똑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사회경제적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며, 경쟁사회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그리는 미래에 과연 누가 살 수 있는지 답해야 한다. 단순히 기술 발전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암을 치료하는 연구, 이동 약자를 위한 로봇 설계도 결국 그것을 누릴 사람들이 배제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미래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인 동시에, 인간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와 함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여파로 사회의 약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더 많은 노인이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해야 하고, 더 적은 청년이 경제를 떠받쳐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그대로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위기는 잘못된 것을 고치고, 의미 있는 가치를 선택할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약자를 포용해야 할 이 시점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서열에 집착하는 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학의 이름에서 자동차와 아파트, 일상의 사소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등급을 매기고,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확인한다. 이는 신분이 고정되지 않은 사회에서 언뜻 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도가 지나치면 인간의 가치는 물질로 환산되고, 타인은 비교의 도구로 전락한다. 결국 많이 가진 이들을 시기하고 적게 가진 이들을 내려다보는 풍경 속에서, 피라미드 아래에 선 이들은 절망하고, 위에 선 이들은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발버둥 친다. 이 문화야말로 미래를 함께 살아갈 힘을 약화하는 장애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병든 노인도 지친 청년도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되지 않는 사회, 피라미드 아래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회를 우리는 만들 수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빠른 성장을 위해 홀로 달려왔다. 이제는 속도를 늦추고, 함께 더 멀리 걸어가야 할 때다. 그 미래에, 당신은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