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연(산경 87) 대법관은 지난 8월 이공계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우리대학 개교 첫 해 수석 입학자로서, 당시 산업공학을 전공했다. 이 대법관은 학부 졸업 후 포항제철에서 근무하던 중 마주한 부당 해고에 대해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직접 준비하고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 경험을 계기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편입해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1997년 사법연수원 26기 수료 후 서울중앙지방법원 서부지원에 판사로 임관했다. 이후 이 대법관은 △법원행정처 정보화 심의관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전담판사 △특허법원 고등법원 판사 △대법원 산하 인공지능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5월 기부금 약정식 및 강연을 위해 학교를 방문했다. 1기 입학생으로서 2024년의 우리대학 모습과 분위기에서 어떤 다른 점을 느꼈는가.
학교에 있었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비해 많은 건물이 들어섰고, 주변 환경도 크게 달라져 학교가 발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포항시는 30년 전과 큰 차이가 없었고, 학교에 방문했을 당시 학교 측에서 1986년이 적힌 기념품을 주셨는데 정말 1986년 물건인 줄 알았다(웃음).
법관으로 일하면서 도움이 됐던 포항공대에서의 경험 또는 수업이 있는가.
경영정보시스템이나 전산 과목 수업이 많은 도움이 됐고 그 외 공학 분야 수업도 지식재산권 관련 분쟁을 처리하거나 기술과 관련된 사건을 처리할 때 도움이 됐다. 이 외에도 학과 학생회나 여학생회 활동을 했던 경험은 법관 사회에서도 기획이나 조직 업무를 맡거나, 상하 또는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풀어나가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우리대학 후배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는가.
지식재산권에 관심이 있다면 ‘왜 한국 기업들은 미국 법원으로 가는가’라는 책을 추천한다. 우리나라에도 특허법원이 있고 지식재산 전담 재판부가 있지만, 시장이 너무 작아 특허권 침해가 인정되더라도 손해배상 액수가 적은 경우가 많다. 또한 증거 수집도 어렵기 때문에 특허권자에게 우호적인 일부 미국 법원에서 소송하는 국내 기업이 많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있어 증거 확보가 쉽고 배심 재판 등으로 인정되는 손해배상액이 비교적 높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지식재산권 소송이 이뤄지는 방식의 차이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 외에도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을 알고 싶다면 헨리 키신저 외 2인이 공저한 ‘AI 이후의 세계’와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 ‘호모 데우스’ 등을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후배가 있다면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포스코 해고 무효 소송 과정에서 어떤 계기로 법조인이 적성에 맞다고 판단했는가.
포스코 해고 무효 소송을 하며 법학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법학, 특히 민법이나 형법은 수학이나 논리학에 가깝다. 법률이 정한 요건 사실이 충족되면 그에 따른 법률효과가 발생하는 구조로, 이공계 전공자의 사고구조에 맞는 점이 있다. 한편 헌법이나 행정법 등 공법 분야는 대립하는 이익이나 가치의 형량을 따져야 하는데, 학부생 시절 읽었던 사회과학 분야 독서가 도움이 됐다.
이공계 학생에 대한 법조계의 수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공계 학생에 대한 법조계의 수요는 자주 바뀐다. 이공계 출신은 △지식재산권 △금융 △건설 △IT 등에서 배경지식이 있다 보니 사안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출발선에서는 한 분야만을 잘해서는 경쟁력이 없고, 민법 등 기초적인 분야의 실력이 뒷받침돼야만 장차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판사가 된 후에도 △디지털 증거 △저작권 △인공지능 등 관련 논문 발표를 꾸준히 이어간 동기는 무엇인가.
판사는 보통 2, 3년마다 사무 분담이 바뀐다. 나는 하나의 사무 분담을 맡을 때마다 논문을 한 편 쓰기로 스스로 다짐했었다. 내가 맡은 재판 분야를 처음 접하는 후임 판사들이 일을 원활하게 시작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성취감도 있었다.
대법관 업무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대법관으로서의 일상을 간략히 소개 부탁한다.
대법원의 업무는 소부 위주로 진행된다. 대법원에는 각 4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3개의 부가 있으며 각 사건은 주심 대법관의 주도로 진행된다. 해당 부의 대법관 전원의 의견이 일치돼야만 판결이나 결정이 가능하다. 소부에서 의견일치가 되지 않거나 기존의 대법원 판례를 변경해야 하는 경우 등에는 대법관 12명과 대법원장으로 구성되는 전원합의체에서 치열한 검토와 토론을 거쳐 판결한다. 이것을 전원합의체 판결이라고 한다. 소부 합의와 전원합의체 모두 하루 종일 사건을 두고 토론하기에 대법관은 높은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된다. 또한 △민사 △형사 △행정 △가사 등 모든 법률에 대해 식견이 있어야 한다. 이외에도 대법원 판결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대법관은 △성실성 △책임감 △인간에 대한 애정 그리고 역사와 시대에 관한 통찰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대법원에서는 사건 하나당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논의를 거치는가.
사건마다 논의를 거치는 시간이 다르기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대법원에서 사건을 맡게 되면 우선 재판연구관들이 개별 사건에 대해 모두 검토를 마치고 토론을 거친다. 이후 대법관이 모여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기에, 한 사건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이 상당하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런 부담을 해소하고자 대법원에서 처리할 사건을 선별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한 대법관이 한 달에만 4~500건의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 상고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 번의 재판을 모두 거쳐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 대부분의 사건은 모두 대법원까지 오는 상황이다. 개인적으로는 상고 허가제를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건이 소중하지만, 사법 자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본다.
법원행정처 정보화 심의관으로 재직할 당시, 법관 업무포털을 처음으로 개발하는 업무를 총괄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맡았던 업무에 대한 설명과 소감을 듣고 싶다.
1997년 2월에 판사로 임관했는데, 당시 사건기록은 모두 종이에 철끈을 엮어 500페이지 단위로 묶여 있었다. 판결문은 기존 파일에 덮어쓰기를 해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하는 수준이었으며 작성된 파일은 제대로 저장되거나 관리되지 않았다. 이후 모든 사건정보가 입력되고 판결문도 서버에 등록하게 되며 업무 프로그램도 여럿 만들어졌으나,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어서 사건 관리의 개념은 없었다. 정보화 심의관으로 부임하니, 법관을 위한 업무 포털이라는 기획서만 하나 주어진 상황이었다. 당시 정보화실 직원들과 합심해 법관이 사용하는 업무 프로그램을 한곳에 모으고, 사건 관리와 일정 관리 등으로 기능을 분류했다. 이후 ‘법관통합재판지원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영어로는 ‘JUSTICE’라고 이름을 붙였다.
대법관으로 취임하며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는 적법절차 원칙을 구현하며, 지식재산권 보호에 힘쓰겠다”라고 했다. 특허법원 판사 재직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현재 국내 사법계의 특허 및 지식재산권에 대한 담론에서 어떤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법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지식재산권 관련 소송에 드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해야 한다. 또한 증거 수집이 용이하도록 기존의 제도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물론 필요한 경우 새로운 제도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침해소송의 항소심을 담당하는 특허법원뿐만 아니라 제1심법원의 지식재산 담당 재판부도 전문화 및 근무 기간의 장기화가 필요하다. 지난해에는 유럽연합의 국가들이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논의를 거쳐 통합특허법원(UPC, the Unified Patent Court)을 출범시켜 개별 국가로는 얻기 어려운 존재감을 가지게 됐다. 특히 유럽의 통합특허법원은 이공계 출신 판사와 법학을 전공한 판사들이 섞여 전문성과 경쟁력을 갖춘 재판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도 장기적 관점에서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지식재산 연합법원 내지 중재센터의 설립을 추진하는 등 그 시야와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대법관 취임식에서 인공지능 사법 서비스 구현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어떤 형태로 사법부에 인공지능이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첫 번째는 재판 지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법관 업무에 인공지능이 △사건 분석 △기초보고서 작성 △유사 판결문 추천 △사실관계 및 증거 정리 등 ‘AI 로클럭’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생성형 AI는 법률적인 정보를 깊이 학습하지 않아 여러 자료를 제시해도 그 속에서 법률적으로 유의미한 쟁점을 뽑지는 못한다. 추후 법관 업무에 인공지능이 도입되면 주장 대조표를 만들거나 유사 판결문을 제공하는 등 재판부가 사건의 핵심에 빠르게 접근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는 변호인을 선임하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를 위해 AI 챗봇 등이 사법 접근성과 사법절차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챗봇 형식을 통해 법률적인 지원과 승소 가능성에 대한 예측을 제공한다면 불필요한 소송이 줄어들고 빠른 화해와 조정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청문회와 학술지 등에서 판결문 등 사법 공공데이터를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사법 공공데이터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게 되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우리 헌법은 공개 재판주의를 택하고 있다. 공개된 법정에서 공무원인 판사가 업무상 작성한 판결문은 공공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공공재는 소송 당사자 개인의 것이 아니므로 개인정보 침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판결문을 최대한 많이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판결문 등 사법 공공데이터가 공개되면 리걸테크 산업이 이를 활용해 다양한 AI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법률 전문가와 일반 국민 사이의 법률 분야에 대한 정보격차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사법 공공데이터 공개를 통해 국민들이 분쟁상황에 처했을 때 향후 결과를 예측하고 보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사법 영역에 AI가 도입됨에 따라 발생하는 분쟁이나 우려되는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AI 도입 이후 분쟁이 생길 수 있다. 혹자는 AI의 파고가 강물을 밀고 들어온 상태이고, 판사들도 이 물결을 거슬러서 헤엄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AI는 피할 수 없는 대세라고 생각한다. 세계 각국의 사법부도 최근 어떤 형태로 AI를 도입할 것인지 여러 고민을 하고 있다. 판결문을 AI의 학습 데이터로 사용할 경우, 개인정보 침해 등의 문제가 고민돼야 한다. 이와 관련해 개인정보를 비실명화하는 등 여러 조치가 논의될 수 있겠다. 또한 판결문이 공개될 경우 특정 법관의 판결 일관성 등 여러 가지 이의제기가 빈번히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 법관을 어떻게 보호할지도 논의가 필요하다.
소위 ‘AI 판사’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가.
헌법에는 ‘법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가 명시돼 있다. AI에 의해 판결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개헌이 필요하다. AI가 판사를 대체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판사의 많은 역할이 AI로 대체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전형적인 사건을 처리하는 데에는 AI가 빠르게 도입될 수 있겠다. 다만, 복잡한 사건의 경우에는 AI가 도입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AI는 기존의 판결문을 학습해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에 기존의 형량을 답습하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지금의 AI는 입력하는 질문에 따라 답변이 달라지기 때문에 재판에 활용되기 위해서는 답변의 신뢰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카이스트 전산학부 겸직교수로 재직할 당시, 학생과 법관의 협력을 통해 인공지능을 이용한 법률서면 요약 파일럿 프로젝트를 수행했다고 알려졌다. 앞으로도 대법관으로서 사법 정보화를 위해 국내 과학기술계와 소통을 이어갈 계획이 있는가.
이론적으로 ‘AI가 도입되고 개발되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이다’라는 문제도 결국 직접 해봐야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카이스트 전산학부 학생들과 재판 과정 중 준비서면을 요약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다만 이런 사법 AI 프로그램을 만들 경우, 정말 훌륭한 원문과 요약본으로 구성된 데이터 세트가 필요하고, 법률과 AI 분야에 모두 지식이 있는 전문가가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법관으로서, 과학기술계와 법조계의 가교 역할이라는 소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는 계속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다. 포항공대와도 긴밀히 연락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대학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인간의 성장은 결국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틀에 의해 한계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허황되지 않는 선에서 목표를 높게 잡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배구할 때 스카이서브를 하듯이 목표를 높이 올려놓고, 그것에 맞게 열심히 달리고 뛰어올라 그 공을 때려야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실제 모습이 그 목표에 미치지 못해서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 목표를 낮게 잡으면 절대로 그 이상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자신의 목표를 높고 크게 잡되, 그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를 믿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절대 중간에 좌절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말고 자신만의 길을 찾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내가 그간 쌓아온 것들, 그리고 앞으로 쌓아갈 것들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지를 부단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는 ‘매일 1% 성장하기’라는 말을 좋아한다. 매일 1%씩 성장하면 1년 뒤 37배 나아진 내가 된다는 생각으로 모두 자신의 성장에 관한 목표를 가졌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계는 그동안 국가의 의사결정을 주도할 리더를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과학기술계에 있는 분들이 본인의 연구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더 많이 고민하고 도전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조금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이공계 출신들이 각 분야로 진출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