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대체품은 없다
완벽한 대체품은 없다
  • 임수연 / 씨네21 기자
  • 승인 2020.07.06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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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큰일을 낼 거라는 징후는 지난해 말부터 있었다. 아카데미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작품들은 이른바 ‘오스카 캠페인’에 뛰어든다. 8월 말 텔루라이드 영화제를 시작으로 전 세계 영화 축제를 돌며 영화인 및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는 활동인데, ‘기생충’은 넷플릭스 같은 거대 기업만큼 마케팅비를 쓰지 못했지만, 봉준호 감독을 필두로 ‘발로 뛰는 홍보’에 헌신했고 미국 배급사 네온의 참신한 홍보 아이디어도 효과적이라 어딜 가든 화제 몰이를 했다. ‘기생충’의 팬들이 SNS에서 보여준 대대적인 활약 역시 업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렇게 ‘기생충’은 세계를 누비며 트로피를 수집했고 다양성이 화두로 떠오른 할리우드에서는 ‘기생충’ 같은 비영어권 국가 영화에 상을 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힘을 얻게 됐다. “아카데미는 원래 로컬 시상식이 아니냐”라는 봉준호 감독의 발언이 이슈가 되면서 이 분위기는 더 거세졌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미국 중심의, 미국인만의 축제가 되지 않기 위해선 그들에게도 ‘기생충’이 필요했다.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영화 잡지사에서 취재기자로 일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 기류가 감지되지 않았을 리 없다. ‘지난 2월 9일(미국 기준)에 맞춰서 ‘기생충’에 대한 큰 특집을 준비해야 한다’라는 것에 의견을 모은 기자들은 앞으로 점점 더 바빠져 만나기 힘들 감독과 제작자, 스태프들을 미리 섭외하며 ‘씨네21’ 1243호가 될 ‘기생충’ 스페셜 에디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시상식 직전 ‘수상 결과 예측’ 기사를 쓸 때는 할리우드 영화 ‘1917’이 작품상·감독상을 가져갈 것이라고 보수적으로 분석했지만, 사실 막판까지 ‘기생충’과 ‘1917’을 놓고 고민했다.
“요즘 시대에 저널리스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특별 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자들끼리 이 질문을 가장 많이 던진 것 같다. 온라인 매체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며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배우 한 명이 매체 60~80여 개를 대상으로 라운드 인터뷰를 돌아야 하고, 어떤 매체에서는 한 기자가 하루에 수십 개의 기사를 쓴다. 유튜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른바 영화를 요약해주는 콘텐츠가 영화 전문지의 공들인 기획 기사보다 훨씬 높은 조회 수를 올린다. 이런 상황에서 공들인 기획 기사를 지향하는 영화지를 구독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남아있을지, 기사를 쓰는 당사자들도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자의 차별성은 취재를 할 수 있다는 데서 온다. 잡지사와 봉준호 감독은 90년대부터 남다른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유튜버들은 절대 할 수 없을 ‘섭외’와 장문의 인터뷰가 가능하다. 타국에서 진행한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를 13페이지나 싣고, 제작자인 곽신애 대표에게 오스카 레이스를 추억하는 포토 코멘터리를 받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를 비롯한 필자들에게 장문의 비평을 청탁하고, 8개 해외 배급사로부터 ‘기생충’의 배급 및 홍보 전략을 묻고 정리한 리포트는 다른 온라인 매체나 유튜버들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잡지가 시중에 풀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기자들의 ‘피땀눈물’로 만든 특집호는 발간 하루 만에 온라인에서 전량 매진됐고,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클릭 수 전체 1위에 올랐으며, 잡지가 너무 잘 팔린 나머지 오프라인 서점에서 동이 나고 인쇄소에서 두 번이나 추가 인쇄를 했다. 긴 글을 소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회의하는 시대에 장문의 기사를 읽겠다고 책을 사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확인하며 힘을 얻었다. 인쇄 매체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있는 한 매체는 존속할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
‘기생충’이 해외에서 인기 있는 이유를 취재하기 위해 현지 배급 관계자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북미를 비롯한 많은 지역에서 이미 VOD 서비스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기생충’을 극장에서 보려고 하는 이가 많다는 것이다. 오스카 수상 이후에는 박스오피스 역주행에 성공하며 역대 외국어영화 순위 기록까지 경신했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 시장의 성장은 최근 몇 년 동안 극장 위기설까지 대두시켰지만. 어떤 영화는 굳이 관객들이 극장에서 봐야만 한다고 믿는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책을 먼저 뒤지는 구세대가 뭐든 유튜브에서 검색한다는 세대를 볼 때 마음이 복잡하다. 스마트폰으로 지하철에서 영화를 보고, 2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나마도 유튜브 요약본으로 대신하는 이들도 있다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극장 영화로서 ‘기생충’이 보여준 힘을 보면서, 그리고 그 작품을 다룬 특집호가 받는 관심을 목격하며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가치를 믿는 이들의 존재를 느꼈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게 가능한 미래가 언제까지일지, 좀 더 낙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