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하는 인터넷 갈등 (2)
범람하는 인터넷 갈등 (2)
  • 박원익 작가
  • 승인 2016.09.2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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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계에 대해 '준법투쟁'을 시작한 웹툰 독자들
지난 7월 메갈리아 옹호 웹툰 작가들 중에서 독자들을 향해 “똥 같은 XX들 알지도 못하면서 지 X 거리네 X나” 발언을 한 작가는 BL(남성 동성애를 포르노적으로 묘사한 만화, 애니, 드라마 등의 장르를 총칭하는 용어, Boy's Love의 약칭) 성인 웹툰 <플라워 밀크>로 데뷔했으며 레진코믹스에서도 연재하고 있었다. 해당 작가가 논란 이후 트위터 세컨 계정(본 계정 외에 특정 팔로워들에게만 노출된 비밀 계정을 의미한다)을 만들고 ‘동인계’와 친분을 쌓자 동인계는 웹툰 작가들에게 실망한 독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동인계란 기존의 만화/애니/드라마/라이트노벨 등의 캐릭터를 대상으로 한 비공식 2차 창작 집단을 의미한다. 동인계에는 공식적인 출판에서 허용되기 어려운 포르노그래픽한 묘사가 빈번히 등장한다. 이 중 많은 여성작가들이 ‘백합’(여성 캐릭터 간의 동성애에 대한 포르노적 묘사를 포함한 장르)이나 ‘BL’ 장르의 작품을 창작하며 동인계 문화를 주도한다. 서브컬쳐 문화가 활성화된 일본의 경우 동인계에서 데뷔한 후 공식적 작가 이력을 시작하는 패턴은 드물지 않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아즈망가 대왕>이나 <요츠바랑!>의 작가 아즈마 키요히코도 동인계에서 성인만화를 그린 전력이 있다.
  한국의 웹툰 독자들은 독자들을 무시하는 관행의 원흉으로서 ‘동인계’를 지목하기 시작하면서 동인계 전체를 대상으로 ‘준법투쟁’을 시작했다. 동인계는 동인 행사를 명목으로 지하에서 백합이나 BL 및 노멀 장르의 음란물을 판매했다. 웹툰 독자들은 이러한 동인계를 상대로(주로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이 유통되어온 이래 거의 사문화된 조항이었던) 형법 제243조의 ‘음화 반포죄’라는 죄명을 꺼내 들며 동인 행사를 무산시키거나 기소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서브컬쳐 전체를 엎어버리는 ‘극단론’을 택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준법투쟁은 몰카 유출 같은 ‘불법’과는 다르다.

서브컬쳐계에 만연한 정치적 올바름의 이중잣대
동인계의 작품을 보면 공식적 출판시장에서 그대로 실리기 어려운 음습한 성적 판타지가 다수 실려 있다. 남성작가든 여성작가의 작품이든 부모는 물론 친구들에게도 보여주기 껄끄러운 작품이 상당수이다. 특히 19금(禁)  동인지의 상당수가 피학적/가학적인 성행위를 묘사한다. 이것을 긍정할 수 있을까?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힘들다. 그러나 이런 (성적) 망상은 서브컬쳐의 기본적인 DNA이다. 건전 만화만 허용한다면 애초에 애니/만화/라이트노벨 등의 장르가 산업으로 정착될 수 없다. 수면 위에 건전한 작품이 있다면 당연히 심해에 온갖 불건전 작품도 공존하는 것이 서브컬쳐 생태계의 생리이다.
서브컬쳐 활성화를 바란다면 남성 덕후이든 여성 덕후이든 그 생태계 내부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타지 따위는 없다는 인정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공식적으로’는 수영부에 소속된 남고생의 우정을 그린 <Free!>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이 있다. 그런데 그 작품의 흥행은 여성 동인 작가들이 멋진 몸매를 소유한 미소년들에 대한 성적 망상을 동반한 2차 창작에 의존한다. 이렇게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망상을 펼치는 것이 과연 정치적, 도덕적으로 올바르냐고 되물을 수 있다. 문제는 이 잣대를 서브컬쳐에 전방위적으로 들이대는 순간 서브컬쳐 판 전체가 존립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독자를 무시하는 언행에 분노한 웹툰 독자들이 행하는 동인계 대상의 준법투쟁은 이처럼 다수의 웹툰 작가들이 서식해왔던 문화적 생태계의 기반 자체를 엎겠다는 각오에서 출발한다. 일반인들은 음란물을 규제하자는 웹툰 독자들의 행동이 그 자체로 뭐가 특별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서브컬쳐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 서브컬쳐의 상상 자체가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렵다. 가령 군대를 배경으로 여성 간 폭력을 묘사한 웹툰 <뷰티풀 군바리>를 여성주의적으로 비판했던 한 작가는 남자를 반라 상태로 고문하거나 여자에게 개 목걸이를 씌우는 작품을 그렸다. 이를 잘 아는 독자들이 음지에서는 서브컬쳐의 비주류적 상상력에 몸담고 있으면서 바깥으로는 ‘여성주의’를 명분으로 타인의 작품과 언행을 검열해온 일부 3세대 웹툰 작가들의 이중잣대에 분노한 것이다. ‘그런 주제에 독자들을 무시하겠다면 서브컬쳐 전부를 불 지르겠다’는 극단론을 택한 것이다.

웹툰 작가들의 자멸적인 전략과 도덕적 해이

특히 동인계의 폐쇄성과 친목 집단화가 작가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주고 메갈리아 논란의 여파를 악화시켰다. 다수 작가와 그들을 추종하는 일부 동인계가 설익은 페미니즘 담론으로 무장한 채 서브컬쳐 전체로서는 매우 치명적인 전략으로 논란에 대응했다. 그들은 자신이 교화(?) 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독자들을 내치거나 지극히 우월주의적인 계몽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들 자신이 논쟁 주제에 대해 일반인보다 나은 지식을 갖고 있거나 페미니즘적 비평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문제는 일부 작가들이 ‘독자의 외연확장 없이 서브컬쳐의 외연 확장도 없다’는 상식을 거부하면서도 서브컬쳐의 번영을 이룬 일본 등 선진국이 이룩한 겉보기의 결과(일부 높은 보수와 좋은 대우)만을 동경한다는 점이다. 레진 코믹스 같은 웹툰 플랫폼 업체가 최대한 많은 웹툰 작가들을 미리 선점하려는 과정에서 선택한 기본급 보장 제도도 작가들의 이러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조장했다고 본다. 웹툰 업계의 시장실패인 것이다. 현재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사태를 직시하는 것이 우선이다. 서브컬쳐는 기본적으로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기 힘든 고유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상상력을 다수의 독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대신 타인과의 ‘구분 짓기’를 위한 선민의식(選民意識)의 근거로 이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서브컬쳐는 붕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