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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 최고, 그리고 인간성
[371호] 2016년 03월 24일 (목) . .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 덕분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비교가 넘쳐나고, 인간이 언젠가는 인공지능에 지배당할 것이라는 우려부터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옹호까지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미래에 인공지능 때문에 없어질 직업의 예측도 심심찮다. 이런 논쟁에 확실하게 결론을 내줄 사람이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하고, 아무리 우려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인간 삶에 끼칠 순기능이 있는 한 인공지능은 더욱 발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려하는 일이 그것도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수준에서는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기술적이 아니다)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는 길밖에 없음도 자명하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근본적인 차이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이 모두 폭넓은 조건에서 최적의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목표였던 데 반해, 인공지능은 최적이 목표가 아니고 정해진 범위에서 최고를 목표로 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생물은 불필요하게 우수한 능력을 갖출 필요가 없으며, 주어진 환경에서 딱 죽지 않고 살아남을 정도의 능력만 유지해야 한다. 지나치게 뛰어난 능력의 유지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이는 생존 가능성을 오히려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얼마나 다양한 생물들이 나름의 절묘한 방식으로 살아남으면서 각기 특유의 장점을 잘 발전시켜 보유했는지 경이롭다. 요즘 유행하는 생체모방연구라는 것이 바로 최적화를 지향해 온 생물들의 다양한 속성 때문에 꽃피우고 있다.
이세돌이 모두 졌다고 해도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이 대결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었고, 그것도 누가 더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만드느냐 같은 경기인데, 이세돌은 재료(두뇌)와 에너지가 한정된 조건에서 그 누구보다 가장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만든 것이었고, 알파고는 재료와 에너지를 무한정으로 쓰면서도 이세돌보다 아주 약간 빠르게 달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 제약조건의 영향을 확실히 예측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싸움을 벌인 탓에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다쳤다. 그렇지만, 변수가 많은 중앙에서 정확하게 집이 될 가능성을 계산하기 힘들었든 관계로 직관에 많이 의지해서 발전해 온 바둑계로 보면, 알파고가 먼 미래의 집 가치를 확인해 준 몇 수의 중앙 착점을 바탕으로 새로운 바둑 형태가 많이 개발될 것 같다. 
많은 전문가들이 말해 왔듯이, 인공지능의 최대약점은 적어도 현재로써는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잘해봐야 우수한 비서나 책사 노릇밖에 못 한다는 것이 되기는 한다. 언제 가능해 질는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인간은 여러 요인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고, 스스로 노력을 통해 발전해서, 결과적으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해 낸다. 동기부여의 원동력은 대개 흥미, 자부심, 성취감, 사랑과 같은 정서적인 것인데, 정서도 경험(학습)으로 다양해지고 발전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배고픔/포만감, 따뜻함/추움, 포근함/딱딱함 같은 기초적 경험을 통해서 아름다움이나 뿌듯함 같은 복합적 정서를 이룬다. 기본정서가 태내에서의 경험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인공지능이 인간과 유사한 정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하다.
인간성이란, 이런 최적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간의 행동 최적화는 매우 많은 변수와 긴 미래까지를 고려하는 것인데, 인간성의 가장 특이한 형태는 배려로서, 때로는 부정부패 같은 일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많은 인간이 함께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인간성이 없는 인공지능엔 봐주기란 기대할 수 없다. 박쥐들은 옆의 굶은 박쥐에게 입속의 음식을 나눠주고 나중에 돌려받고 하는데 말이다.
최적의 추구는, 엄청난 생물 다양성이 입증하듯 많은 개체가 공존할 수 있는 텃밭을 제공하는 반면, 최고의 추구에서는 배려는 악이고 결과적으로 단 하나의 개체나 시스템 만이 최종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성의 소멸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공지능이 아니었어도, 산업화와 경제력의 집중화를 따라 상당기간 진행되어 왔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는 비로소 그 괴물스러움과 우려가 가시화되기 시작했으며, 앞으로도 경제력이 인간사회를 좌우하는 장악력을 인위적으로 약화시키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최고추구의 유일한 게임 룰인 승자독식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패러다임이 되었고, 모든 영역으로 무차별적으로 파급되고 있다. 동료와 이웃에 대한 배려는 벌써 꽤 자취를 감추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늘어가고 있다.
무조건적인 경쟁과 최고의 추구는 인류공존의 가능성을 좀먹고 있고, 이와 함께 우리의 인간성도 말라가고 있다. 최고의 추구를 최적의 추구로 대체하는 사회적 제도 도입이 정말로 절실하다. 우리가 동물적 속성을 가지고 인간성의 따스함을 즐기면서 계속 존재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포스텍은 최고를 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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