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행동 사이에서
국가와 행동 사이에서
  • 김기흥 / 인문 교수
  • 승인 2014.06.04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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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6일 이후 한국사회는 더 이상 같을 수 없게 되었다. 더 많은 짐을 실어 이윤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배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평형수를 빼어버린 세월호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본과 이윤에 멍든 우리 사회를 보았고, 속절없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젊은 친구들을 그 많은 첨단장비로도 꺼낼 수 없는 기술의 무기력함을 보았으며, 마치 콜로세움에 검투사들의 싸움을 보여주는 것처럼 이런 저런 멜로드라마의 이미지로 가득찬 과잉 이미지 앞에 주저앉아 움직일 생각할 수 없이 마비된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며 우리의 생명을 구해줄 거라 생각했던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서 분노하고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우리가 만들어낸 산업화의 풍요함과 민주주의의 자유로움 속에서 좀더 편안하고 안락함을 위한 삶에 모든 힘과 영혼을 집중하는 동안에 우리가 갖고 있던 주권자의 힘은 아무 생각없이 국가에게 위임되었다. 국가는 이렇게 위임받은 권력을 이용하여 주권자인 국민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생명을 지켜주어야 한다. 전통적인 관점에 서는 국민들은 국가와의 계약관계를 통해서 국민의 자유와 안전 및 생명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항상 그렇게 공공선을 추구하고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해왔을까?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조르지오 아감벤 (Georgio Agamben)에 의하면 근대적인 국가권력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폭력과 법적 정의가 구분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우리는 모두 법이 적용되는 국가의 보호대상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는 끊임없이 예외조항을 만들어 우리도 국가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이 이론화한 국가의 폭력성과 법적 정의의 혼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이 바로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생명을 바라보는 개념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보호대상으로서 생명 (비오스, bios)과 국가주권의 공간에서 배제되는 생명인 벌거벗은 생명 (조에, zoe)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존재했다. 특히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은 ‘신성한 사람 (homo sacer)’라고 해석될 수 있지만 실상은 로마시대 평민법정에서 범죄행위에 대한 단죄로서 제물이 될 수 없으며, 살인죄의 법적용의 예외대상이 되는 대상이다. 즉, 국가폭력의 대상으로서 법적인 보호에서 예외대상이 되는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다. 근대적 국가권력은 결코 우리에게 편안함과 안전만을 제공하는 그런 선한 존재가 아니다. 아감벤이 바라보는 근대적 국가권력은 정상적인 상태의 시민들을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폭력의 대상, 벌거벗은 생명의 예외상태로 몰아가게 된다. 근대적 국가권력의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은 국가지배집단의 이해관계에 의거해서 항상 보호자의 모습에서 폭력자의 모습으로 전환될 수 있다.
제주도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와 즐거움이 가득했던 세월호의 승객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안내방송에 순종하고 따르면서 곧 국가가 이 위험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조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많은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 확신은 곧 자신들이 바다물 속으로 휩쓸려가면서 예외대상이 되었음을 인식했을 때의 그 배신감과 공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세월호의 승객들은 정상적인 시민들이었으며 국가가 제공하는 안전과 보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4월 16일에 그들은 더 이상 국가의 보호대상인 정상적인 시민이 아닌 폭력의 대상이면서 예외상태인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외상태의 극단적인 상황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슬픔을 공유하고 우울해하면서도 ‘아마 나에게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꺼야’하면서 안락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안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아감벤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국가권력과 국민 (또는 시민) 사이의 모호한 관계는 어느날 갑자기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잠재성을 항상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논의는 항상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소수자들에게 적용된다고 믿어왔다. 예를 들어, 인종적인 소수자들, 이주민들, 노동자들, 성소수자, 여성이 보통 이러한 예외상태의 벌거벗은 생명으로 취급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어느날 갑자기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포스텍이라는 안정되고 편안한 공간에 둘러싸여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포스테키안들도 갑자기 ‘이공계의 위기’와 같은 상황에서 “공학을 전공하는” 소수자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누구도 보호해주지 못하는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국가권력이 포스텍 공동체를 포기하는 상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와 위험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우리를 갑자기 예외적인 상태로 전락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를 찾아내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그 위험은 항상 불확실성을 동반하는 개념이다. 불확실성이 전제된 개념으로서 위험은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다.  예외상태로의 전락의 위험은 내재적으로 본래적인 속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법적 정의와 폭력이 애매모호한 경계선상 위에서 공존하는 것처럼 정상적인 상태와 예외상태도 모호하게 공존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단순히 우리의 주권을 국가에 무조건적으로 ‘맡겨두게 된다면’ 국가의 또다른 폭력적인 면에 대해서 견제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로 폭력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단순하고 맹목적인 형태로 국가의 권위에 의지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선명한 사례가 바로 황우석 사태가 될 수 있다. 맹목적인 국가주의와 애국주의에 의해서 보호되고 지원되던 한 과학자의 멈출 수 없었던 질주본능은 방향성을 잃고 한국의 생명과학계, 특히 줄기세포 연구자들을 예외상태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은 우리의 취약성을 노출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와 악마의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국가권력의 양면성은 어떻게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시 여기고 편안함에 안주했던 권력의 위임형태인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양면성을 통제하기에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만일 예외상태의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이고 싶다면, 우리는 직접적으로 위임한 권력에 대한 지속적인 견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저 ‘가만히 있으라’라는 안내방송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회의해보고 체크해야 할 것이다. 그 방식은 무엇일까? 간단히 월가를 점령하라는 미국의 ‘오큐파이 (occupy)’ 운동이나 ‘아랍의 봄’과 같은 운동은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자신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행동은 예외상태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잉여세대로 표현되는 것처럼 ‘불안정 고용과 양극화, 정치에 대한 혐오감, 극단적 개인주의 그리고 우울함’이 가득한 상황에 무력하게 안주한다면 어느새 우리는 ‘예외상태’에 놓일지 모른다. 차라리 이에 대해서 문제제기하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성을 통한 행동함으로써 우리를 함께 보호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