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동산] 지도교수와 학문의 정체성
[노벨동산] 지도교수와 학문의 정체성
  • 마은정 / 인문 대우 조교수
  • 승인 2011.09.28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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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환상이 깨지고 좌절하는 순간,
학문을 함께 연구한 지도교수와 동료들이 떠올라

 현대사회에서 가장 흥미로운 학문의 한 분야는 과학기술학이다. 이 마법에 완전하게 매료되어 과감하게 과학기술학이란 학문에 입문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과학기술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접근. 이 신생학문의 정체성과 문화를 엮어가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 학문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역사, 인류학, 사회학과 같은 통상적인 학제적 구분을 넘어선, 다학제간 프로그램(trans-disciplinarity)의 강점은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교육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학과 프로그램의 이상과 지도교수의 학문적 성향에 따라서 학생 교육 및 연구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즉, 학교의 특성에 따라 과학기술학은 다양한 성격의 학문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실례로 미국 및 한국의 과학기술학 프로그램들은 학교에 따라 다양한 연구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는 구성원들의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미국과 유럽에만 친숙한 교수와 한국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학생. 우리 두 사람이 10년 전에 만났을 때의 모습이다. 학생이 한국의 과학기술을 연구하겠다고 했을 때,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연구주제의 적절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며 연구를 독려했다. 북미와 유럽학계를 중심으로 시작된 과학기술학이기 때문에 연구 또한 그 지역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던 당시 학계 상황. 비서구권 지역에서의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점이었다. 특히, 탈식민지적/세계화 시대에서의 과학기술과 국가발전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절실하게 요구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런 학계의 흐름을 읽고서, 지도교수는 아시아에 속한 한국 연구의 중요성을 읽었던 것이다. 실제, 지도교수는 한국이 남북한으로 분단되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지구 남반구에 위치해 있는지 북반구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한국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제자의 연구를 지도하면서 한국에 대해 배울 준비를 하고 있었고, 공부하기 시작하는 열정을 아낌없이 보여주셨다.

 그 아낌없는 열정에는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었다. 한국 관련 연구를 보편적인 과학기술학이란 학문의 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사례가 보편성이란 틀 안에 놓이지 못하면 그 설득력이 약화될까 우려함이었다. 특히, 기존 본인의 연구의 협소성에 대한 비판을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자들은 그 비판을 넘어서는 연구를 하기를 바라셨다. 대학원 과정을 통해 필자가 만난 많은 교수들이 이렇게 자신의 연구에 대한 겸허한 태도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동료들과 친하게 지내.” 지도교수와 첫 면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다. 동료들과 친구가 되었을 때, 학문을 통해서 얻기 어려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코넬의 과학기술학은 가족감 유대감을 중요하게 실천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정규 수업 외에 매주 두 차례 열리는 학과 전체 세미나, 학기 초와 말에 열리는 학과 전체 구성원(가족 포함) 모임, 매주 누군가의 집에서 열리는 소소한 사교 파티, 계절마다 열리는 교수님 집에서의 파티 등등. 이런 종류의 비공식적인 모임을 통해 학과의 정체성과 학문의 정체성을 더 공고히 하고 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처음 이 학문에 품었던 희망과 환상이 깨지고 좌절하는 과정을 수억 번은 겪으면서, 절실하게 소중한 것을 얻었다. 과학기술학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좌절했던 그 순간을 같이했던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지도교수이다. 고민과 좌절, 애증과 분노, 이런 감정들이 학문하는 과정의 즐거움과 일부임을 깨닫게 해 준 이들이다. 이제까지의 삶에서 지도교수 만큼 미워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없었을 듯하며 앞으로도 없을 듯하다. 폭풍 같은 고민과 좌절의 시기는 지나가고 학문의 정체성과 학문의 의미에 대한 회의는 사라졌지만, 그 시기를 함께 나눈 이들은 평생의 희망으로 남을 듯하다. 이제는 학문의 의미를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는 것, 과학기술학과 이를 통한 만남이 준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