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동산] ‘인문학적 상상력’은 위험하다
[노벨동산] ‘인문학적 상상력’은 위험하다
  • 이진우/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10.09.22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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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상상력의 의미와 중요성 커져
새로운 과학ㆍ기술 발전시킬 창조경영의 동력

 요즘 인문학이 뜨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가 공공연히 거론되는 대학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말은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른다. 신자유주의의 경쟁논리가 강화될수록 대학에서 인문학의 위상이 추락한 것도 사실이지만, 눈을 조금만 돌려 바깥세상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현상을 접하게 된다. 인문학의 르네상스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인문학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식 나눔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문학 강연에서 노숙자들은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 경제전선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는 CEO들은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창조경영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어디 그뿐인가.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와 상품으로 이 시대의 문화를 이끌고 있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스스로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경계’에서 움직인다고 말하지 않는가. 대학에서 인문학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인문학적 상상력의 의미와 중요성은 점점 더 일깨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엄청난 속도로 변하는 사회를 대학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사회는 융합과 통섭을 통한 새로운 학문의 패러다임을 요구하는데 대학은 기존의 제도를 고수하고 있지 않은가? 인문학은 허울 좋은 전인교육의 미명 아래 학문적 알리바이로 이용될 뿐 그 의미와 유용성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편견에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젊은이의 영혼을 유혹하여 전공교육을 소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일고 있는 인문학의 열기를 단순한 유행으로 증발시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이야기 하나를 들어보자. “아주 오랜 옛날에 동네 한가운데 공동우물이 있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습니다. 물을 길어올 수 있는 편안한 거리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사람들은 선선한 저녁이면 물을 긷기 위해 우물로 모여들어 이야기도 나누고, 정보도 교환하였습니다. 우물은 마을 공동체를 묶는 중심이었습니다. 어느 날 수도관이 연결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수도의 편리함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마을은 점점 더 커져서 도시로 발전하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물은 마을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였습니다. 광장, 시장, 카페.”

 이 이야기는 인문학적 상상력의 본질과 역할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이 왜 위험한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첫째, 인문학적 가치는 사람과 사람의 삶 속에 있는 가장 깊은 것이다. 그것은 마을의 공동우물처럼 사람과 사람을 엮어주는 근본가치이다. 인문학의 중심과 근본은 사람이다. ‘급진적이다’, ‘철저하다’는 뜻의 영어단어 ‘래디컬’(radical)이 본래 ‘근본으로 돌아가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근본적인 것은 항상 극단적이고, 극단적인 것은 위험하기 마련이다.

 둘째, 첨단 과학과 기술로 말미암아 사회가 변하였다고 할지라도 광장, 시장, 카페처럼 새로운 공동체적 공간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사람과 사람의 삶과 관련된 이 물음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요청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적 상상력은 항상 학문의 경계를 파괴한다.

 셋째, 인문학적 상상력은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노마디즘과 닮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인문학적 상상력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류발전의 끝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은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힘이 증대하면 할수록 사람과 인간다운 삶에 관한 성찰은 더욱 더 요구된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때로는 기존의 과학과 기술에 제동을 걸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저항은 거꾸로 새로운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우리가 21세기의 공동우물을 발명하고자 한다면 위험한 인문학적 상상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