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대중문화
디지털 시대의 대중문화
  • 라도삼(중앙대 강사,사이버문화연구실 연구원)
  • 승인 2000.05.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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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 문화로 나아감을 위하여
드러냄의 문화
1979년 캐나다 퀘벡 정부 대학협의회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료따르(J. F. Lyotard)에게 ‘발전한 사회에 있어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컨설팅을 맡긴 것이다. 어렵기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에게 주 정부의 연구프로젝트를 의뢰한 것 자체가 모험이었지만, 과연 전문가가 아닌 철학자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줄 것이냐 또한 의문이었다. 료따르 스스로도 그 점을 매우 두려워했지만, 어쨌거나 컴퓨터가 지배하는 탈산업사회에 있어 지식에 대해 명료한 해석을 던졌고, 이후 <포스트모던의 조건>(La Condition postmoderne)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그는 우선 컴퓨터 사회에 있어 지식은 새로운 채널에 맞게 변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쉽게 말해 컴퓨터 시대에 맞게 지식은 디지털로 변환될 것이며, 변환된 지식만이 네트워크를 따라 교환되고 소비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지식은 그 본래의 가치인 사용가치를 상실하고 교환대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고 했다.

이 생각은 매우 정확했다. 사이버네틱 환경으로 진입하고 있는 요즘, 문화의 핵심은 ‘드러냄’과 ‘교환’으로 압축되고 있다. 모든 것은 드러나야 한다. 아니 드러나게 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네트상에서 나타나는 다중인격성(multi-personality)은 이미 보편화된 사회적 현상이다. ID화한 주체들은 성별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이/학력/경제력/계급/인종 등과 같은 모든 아날로그적 코드를 벗어 던진다. 그것은 차라리 본능적인 id(프로이드)에 가깝다. 사회적 규범과 질서로부터 규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거대담론의 상실은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이탈되어 가는 힘들의 표출에서 주어진다. 한 벤처기업의 메일서버를 마비시킨 해커는 재미로 그랬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재미로 혹은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드러낸다. 목적하는 바가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사회적 정당성이나 규범을 목표로 하진 않는다.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

욕구를 넘어선 욕망
이 수많은 욕구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네트다. 네트는 이 수많은 욕구들이 교환되는 장소로, 각각의 욕구들은 더 많은 교환과 생산을 위해 더 자극적이고 충동적으로 움직인다. 거대담론(superego)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서사(id) 뿐. 모든 언어는 경쟁상태에 들어간다.

사이버네틱 문화 현상은 단지 컴퓨터 네트워크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컴퓨터 네트워크를 따라 만들어지는 문화적 현상, 즉 현실계의 문제다. 규범성과 정당성, 합리성에 충실했던 80년대 이데올로기 문화와는 달리 마니아적 충실함과 개성 표출, 이탈적 가치와 탈규범적 행동으로 가득 찬 이 새로운 문화는 바로 컴퓨터 네트워크가 연출하는 비트의 문화다.

MP3 플레이어와 헤드셋, 핸드폰과 노트북 컴퓨터로 무장한 이들은 거대한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네트를 어슬렁거린다. 이 어슬렁거림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막는 그 어떠한 흐름도 거부하며, 자신의 욕망에 맞춰 모든 대상과 세계를 통제하고자 한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행동과 표현양식들. 같은 것보다는 차이를 좋아하며, 숨기기보다는 드러내길 좋아하는 문화들. 거대한 네트를 따라 비트족들은 사이버노트(cybernaut)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사이버노트로서 이들이 최초로 발을 딛은 곳은 포르노였다. 과학학술망인 NSFNet에서 인터넷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1993년도 초반부터 인터넷은 포르노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사이버폰(cyberporn)으로 명명된 이 현상은 인터넷을 적조로 물들이며 급기야 통신품위법(Communication Decency Act)의 제정을 불러 일으켰지만, 수많은 네티즌과 과학연구자들, 그리고 상업적인 기업과 사적 단체들과 연대해 이 법령을 폐기시켜 버렸다.
그러나 적조에 빠진 바다에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은 더 위협적인 상업적인 유혹이었다. 세계 도메인 시장의 80%를 지배하기 시작한 닷컴(dot com)사들. 그들은 갈곳 모르는 사이버노트들을 잡아 놓고자 각종 이벤트와 경품제공, 경매와 사이버머니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프라이스라인(www.priceline.com)을 통해 불거지기 시작한 BM(Business Model) 논쟁과 mp3.com과 냅스터(www.napster.com)로 이어진 저작권 논쟁, 그리고 도메인 사재기 등과 같은 상업적 욕구의 충동은 인터넷의 바다를 어느새 상업적인 욕망으로 공간으로 변질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나 냅스터의 수호신이었던 샤드 펄슨의 배신행위에 보여주었던 네티즌들의 공격과 컨텐츠 유료화를 선언한 yahoo.com과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공격, 1세대 해커인 리차드 스톨만의 GNU와 리눅스의 출현 등은 상업화의 욕망에 대항하는 사이버노트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비트족의 욕망을 자신의 사이트에 가두고 영토화하려는 흐름은 줄기차게 이어질 것이다. 거대한 벤처 캐피탈과 M&A전략, 브랜드의 파괴력, 상업적인 광고들과 전자상거래 등은 이미 줄기찬 욕망의 흐름을 낳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네티즌들의 저항 또한 거세질 것이다. 수많은 네트워커들이 그런 상업적인 욕망에 반대할 것이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또 다른 욕망과 저항의 탈주로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네트는 문화의 공간
자유분방한 히피였던 티모시 리어리(T.Leary)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어원을 그리이스어인 kubernetes로부터 구함으로써 사이버스페이스를 자유로운 항해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어떠한 규범과 규율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항해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1세대들의 항해에 불과하다. 네티즌(netizen)이란 개념을 처음 제시하였던 허번(Hauben, 1997)은 단순한 네트 사용자들이 아닌 적극적인 문화의 생산자와 수용자로서 네티즌을 제안하였다. 네티즌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트워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창기 항해자들은 아마도 상업적이고 오락적인 음란물이나 게임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러나 2단계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서핑을 시도하며, 3단계에 들어 홈페이지와 게시판 운동을 통해 본격적인 참여와 생산의 문화를 만들어 가게 될 것이다. 이어진 4단계에 들어가면 이들은 자신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될 것이고, 네트워커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될 5단계를 준비할 것이다. 곧 네트워커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네트워크를 만들며, 네트를 통해 자아를 실현시켜 가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사이버네틱 문명은 이런 드러냄과 차이, 그리고 참여와 생산의 문명이다. 디지털의 세계, 비트족의 문명은 생산적이진 않다. 그들은 단지 드러낼 뿐이다. 이 드러냄이 생산적인 문명으로 되는 것은 네트를 만났을 때이다. 생각이 같은 사람, 개성이 같은 사람, 관심이 같은 사람, id가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모여 네트를 만들고 비트를 조직할 때 네트는 만들어진다.

네트는 문화의 공간이다. 드러냄을 넘어 생산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을 때 네트는 비로소 생명력을 갖고 움직인다. 무한대에 펼쳐진 욕망의 공간. 그 욕망이 상업적인 욕구에 의해 포획될지 아니면 무한대에 가까운 자아의 선(net)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네트는 끊임없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며, 그 네트로부터 우리가 만들어진다는 사실 뿐. 이제 우리는 비트의 세계를 넘어 네트의 세계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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