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공대생다운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포항공대생다운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 이유진 / 산공 03
  • 승인 2003.12.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과제물 지상 콘테스트 - 우리만의 색깔을 찾아서 (여명숙 교수의 글쓰기 강의)
“지성인의 전당인 여러분 대학의 특징적 문화는 무엇입니까?”라는 교수님의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야식문화요.”라고 답변하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다분히 공돌이스런 단순한 반응에다가 나 역시 별다른 답안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교문 앞까지만 음식 배달이 허용되는 타 대학에 비해, 우리 학교는 기숙사안까지 배달되는 선진적 시스템이므로 분명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는 어떤 학우의 말에는, 모두가 자조적인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인 생활은 야식 문화와 연관되
어 대학 시절에 한번쯤 겪어봐야 할 낭만 정도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실이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과연 포항공대생을 포항공대생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학교 구성원들로부터, 심지어는 교정, 학교 건물의 체취에서부터 느껴질 수 있는 포항공대의 정신(spirit)이나 정체성은 없는 것인가? 포시스 입력 창에 집어넣을 아이디와 학번 외에 무엇이 있을까? 정신 없이 보낸 대학생활 1년을 마감해 가는 지금, 포항공대를 선택한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남은 시간을 더욱 값지게 보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연속극 <카이스트>에 나오는 공학도의 모습이 너무 멋져서, 연구의 성과가 산업과 바로 연결되는 학문의 매력 때문에, ‘어쩌다가 점수대가 맞아서’ 등등 우리학교에 오게 된 사연은 여러 가지 이지만, 공통된 목표는 훌륭한 공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한 질문이 뒤따른다. 왜 꼭 포항공대이어야 하는가? 학비가 저렴하면서 지명도 높은 대학이니까 취직이 잘 될 것이므로라는 답변은 너무 통속적이다 못해 청년기의 이상을 모두 포기한 것 같아 천박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더 근원적인 데 있다. 일류 교수진과 좋은 실험실에 기반하여 공학적 지식을 쌓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포항시 효자동에 위치한 기숙사에서 야식을 먹어가며 수업시간마다 들어가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포항공대를 사이버대학으로 대체하면 안되는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포항공대만의 특별한 문화가 있는가?

먼저 외적인 환경에 대해서 검토해보자. 우리 대학문화는 기숙사 생활과 작은 규모의 대학이라는 특성에서 시작된다. 기숙사 생활은 물리적 이동에 드는 비용을 줄이면서도 학우 간의 친밀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환경이지만 좁은 공간에서 북적북적 거리며 살수록 마음이 공허하고 삭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워낙 학생 수가 적은 학교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누가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속의 생각을 친구나 선배에게 털어놓는 다거나 함께 고민하여 해결책을 찾는 일은 거의 없다. 또한 젊은 혈기에 돌발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자기 주장을 멋지게 하여 주변을 즐겁게 하는 깜짝쇼도 찾아 볼 수 없다. 자존심 강한 모범생들로서 한 식구처럼 작은 울타리에 살면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인격적 측면에서의 ‘개성’이 무시되고 모두 평범해지고, 기성세대보다 더 판에 박힌 젊은이 아닌 젊은이들로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우수한 고교시절을 보냈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 인간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안으로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쌓인 마음의 생각들은 익명성을 이용해 온라인 상으로 표현되고 활발한 토론과 다양한 의견교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정작 오프라인에서는 모두가 침묵한다는 게 문제다. 온라인에서는 사람보다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만, 오프라인 상에서는 의견자체 보다는 어떻게 생긴 누구인지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포항공대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러한 억눌린 분위기가 우리를 속칭 ‘공돌이적’ 사고방식에 가둬두는 주범이라고 본다. ‘공돌이적’ 사고방식이란 어떤 질문에 대해서든 무관심하고, 무비판적이며 교과서적인 답변을 내는 단순 무식한 태도를 말한다. 정말 촌스럽고 답답해서 미치겠다. 뭐 좀 시원한 것 없을까?

만약 인터페이스가 완벽하게 구현되어서 마치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컴퓨터와 통신망이 구축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마이크로 대화하고, 질문하고, 친구들에게 속삭일 수 있는 기능까지 갖춘 사이버대학이 현실대학을 대체하게 되면, 우리는 물리적 특수성에 연유한 외롭고 삭막한 심리적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왜냐하면 사이버대학의 경우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지식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인간관계 역시 선택적으로 결정하게 되는데, 이 경우 학습과 인간관계의 편식현상이 가중된다는데 문제가 있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한 고립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지, 덕, 체를 골고루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학습이 필요하며, 인간과 인간이 직접 만나는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지식을 쌓기 이전에 교수를 만나고, 선배를 만나고, 학우를 만나서 인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설령 꾸벅거리고 조는 한이 있더라도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이다. 학습의 효율성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교육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사이버 대학은 포항시 효자동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학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다시 우리 내부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결론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일깨울 수 있는 강력한 정신이나 사조이다.

우리가 가진 여건을 긍정적으로 둘러보자. 우리는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만큼 각자는 생활력이 강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지는 훈련을 할 수 있다. 즉 자율 정신의 함양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더욱이 03학번부터는 학비와 장학금이 지급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자립도 가능하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개개인이 정신적,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성숙한 인간으로 설 수 있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수동적인 공돌이가 아닌,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책임감 강한 멋진 공대생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단순히 공학적인 소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현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동아리가 아닌 특정 분야의 관심사를 오프라인 상에서 공론화 하는 클럽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이 클럽이 기숙사 단위로 확장되어, 기숙사 동마다 특정한 성격과 전통을 가지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를 들어, 예술이든 정치든 특정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끼리 기숙사에 모여 살면서 정기적으로 토론회를 열고, 때로는 파티타임도 가지면서 사상이나 가치관을 오프라인 상으로 주고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포항공대생이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실천한다면, 기숙사라는 공간은 더이상 폐인들의 은신처가 아닌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공간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우리학교엔 학생이 원하면 얼마든지 지원해줄 학교 행정과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안전하고 편리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자기 전공을 향한 학문적 열정을 최대한 불사를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자율’과 ‘열정’을 일상적인 삶 속에 창조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나는 휴머니즘만이 우리 대학문화를 상승시킬 수 있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위한 공학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데서, 내 옆의 친구가 잘 지내는지를 배려하는데서, 우리 사회가 살만한 곳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염려하는 데서 우리는 단순 공돌이가 아닌, 포항공대 표 해결사임을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이 선배와 친구들과 공유되면서 생산적인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이룰 때 포항공대 출신다운 색깔을 입게 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시계탑 앞의 빈 좌대 위에 자기 토르소를 꼭 올려놓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 순진함에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는 연구실의 불빛 아래 지성을 불태우는 동료와 선배님들 속에 묻혀 있으면 미치도록 행복하다. 넓은 마음으로 심호흡을 한번 하고, 제일 맛있는 야식 메뉴를 고른 후, 방학 동안 마음을 살찌울 도서 목록을 적어보자. 지금, 여기 우리학교가 아니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기쁨이 차오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