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논단]신문과의 대화
[독자논단]신문과의 대화
  • 이길호(전자 07)
  • 승인 2009.12.09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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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생각을 뚜렷이 가진 인격체인 마냥 행동하기 때문에 신문을 읽는 동안 즐겁다 ... 만약 세상에 완벽한 신문이 존재한다면 지겨워서 신문과의 대화를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고교 시절 나는 매일 졸린 눈을 비벼가며 두껍게 접혀진 회색 종이를 보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두꺼운 종이뭉치는 매일 항상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너는 나의 생각에 동의하니?” 사실 신문이라는 상대가 전해준 이야기만 듣고, 그가 해석한 단상들만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되기 때문에 나는 매우 불리한 조건에 있지만, 그래도 쓴웃음을 짓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와 대화한다. 왜냐하면 신문이라는 정체모를 상대와의 대화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문은 자유롭다. 신문사라는 단체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사람의 눈빛ㆍ몸짓ㆍ말투 하나하나에 그 사람의 인격이 느껴지듯이 회색 종이 군데군데에 있는 문투들이 모두 신문의 생각을 대변해준다. 또한 신문은 겁이 없다. 때로는 정권ㆍ재벌과 싸우고, 국민들과도 싸운다. 때때로 강자와 싸우기도 하면서 그들에게 아첨하기도 한다. 약자를 보호하기도 하고 오히려 괴롭히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신문을 읽는다. 하나의 생각을 뚜렷이 가진 인격체인 마냥 행동하기 때문에 신문을 읽는 동안 나는 즐겁다. 신문을 통해 나는 의견에 동의할 때는 그의 논거를 내 것으로 흡수하고, 동의하지 못할 때에는 반대 논리를 생각하고 내세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때때로 지나치게 속물적인 감각에 물들어 많은 지탄을 받는 녀석이지만, 이렇게 속물적이기에 신문을 읽는 동안 나는 심심하지 않다. 만약에 세상에 완벽한 신문이 존재해 버린다면 나는 지겨워서 신문과의 대화를 더 이상 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예전처럼 신문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믿으며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던 시대는 지났다. 예전 사회는 이 녀석이 조잘조잘 이야기하면 그 의견에 따라가곤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일까? 이 신문이라는 친구도 이제는 예전과 같이 겁 없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예전의 모습을 버리고 다양한 방향으로 새롭게 살 길을 찾아 교묘하게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고, 자신의 성격과 색깔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언론에 있어 자본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권위지든,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 조그마한 일간지이든 사정은 많이 다르지 않다. 언론권력이라는 말조차 들어왔던 신문이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다양한 매스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정보의 유통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 커뮤니케이션이 자유로워진 오늘날, 예전처럼 신문이 자신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기에는 더 이상 이 사회와 대중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을 듣고 보고 알고 있더라도, 나는 신문과 대화를 한다. 요즈음 모두들 ‘어려운 조국’을 걱정하고, ‘이 정부 들어’ 세상 살기가 많이 어려워졌다고 비판의 한 목소리를 내는 이 판국에, 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느끼는 도덕적인 깊은 의무감과, 비록 크지는 않지만 양심 어린 얄팍한 나의 지식과 생각으로 이 사회를 감시하겠다는 눈빛을 가지고, 이렇게 신문과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