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하는 내셔널리즘의 길
상생하는 내셔널리즘의 길
  • 강탁호 기자
  • 승인 2008.09.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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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1. 편협한 우리의 내셔널리즘

예전에 몇몇 이들은 일본 고베 대지진을 보며 웃었다. “쪽바리들 잘 죽었어”라며. 중국발 기사엔 놀림과 조소의 댓글이 달린다. “더러운 짱개들.” ‘쪽바리’는 무조건 나쁜 놈이고, ‘짱개’는 무조건 이상한 놈들이다. 그럼, 우리는 착한 놈?


1) 내셔널리즘의 현실

<장면 1>
“피가 더러운데 겉이 깨끗하겠냐?” - 중국 응원문화 비판 기사에 달린 싸이 댓글.
“일본 원숭이는 죽어도 괜찮다. 일본 원숭이에게는 영혼이 없다.” - 일본인 피랍 기사에 달린 싸이 댓글.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일본·중국발 기사에 흔히 달리는 댓글들이다. 이들 댓글들을 단 사람들의 사고를 대강이나마 유추해보자면 문자 그대로 일본인은 영혼이 없는 원숭이 ‘쪽바리’, 중국은 피부터 더러운 ‘짱개’이다.

<장면 2>
‘환단고기’는 재야사학계의 성전이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이 책을 근거삼아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한민족 왕국과 한민족의 중국 지배설 등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 근거는 단순히 고문 해석에 의존해있고 고고학적인 증거가 밝혀지지 않으며, ‘환단고기’가 위작이라는 근거를 감안해 이미 사학계에서 이 책을 역사 연구에 이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한민족을 재야사학의 이름으로 불러내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으며, 인터넷에도 이에 관련한 수많은 포스트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외에도 우리 주위에는 한민족의 위대함·등을 강조하는 주장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순혈주의겢騈球适렝?내세워 혼혈을 무시하는 태도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주장들의 이면에는 또 한국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던 잘못을 숨기는 태도가 깔려 있다. 월남전쟁의 양민학살을 들어 봤는가? 외국인이 한국에 대해 조금만 비판을 해도 앞뒤 따짐 없는 안티가 곧바로 따른다. 몇몇 지식인은 우리나라의 민족주의가 과잉상태라며 우려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2) 민족주의의 역사

민족은 국가의 형성에 접어든 근대에 생긴 개념이라고 사학자들은 본다. 필연적으로 국가는 국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구성원들의 단결을 도모해야 하고, 구심점으로 ‘민족’이 크게 부각되곤 했다. 근대화에 접어든 조선에서 민족주의의 붐이 일어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말 조선왕조 때만 해도 절대적 유교 가치였던 충군은 외세의 침탈과 간섭이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개화기에 이르러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국가주의라는 신가치로 대체되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지면에는 애국을 부르짖는 사설이 실렸고, 민족의 밝은 미래와 그에 수반되는 노력에 관한 사회적 담론과 토론회가 도처에서 개최됐다.

일제시대에 민족은 식민지 치하 한국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다. 일제의 침탈에 맞서는 저항적인 성격의 내셔널리즘은 3·1일 운동, 독립군 투쟁 등을 통해 표출되었다.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을 대신해 국가·반공주의가 최우선 기치로 조망받게 된다.

70~80년 군사독재 시절은 반공을 국시 삼아 지배체제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가치가 부각된 시기였다. 3S(Screen, Sex, Sports)의 하나인 스포츠를 통한 국민단결심 고취가 널리 유행했고, 황지우 시인의 시에서 보이듯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해야 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이나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교육의 영역에서 국민과 국가·민족의 가치를 그 어떤 것보다 크고 위대한 것으로 만들었다.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활발해진 90년대, 2000년대 들어 반공주의나 국가가 가지는 절대적 권위는 약화되었지만 배타적 내셔럴리즘, ‘우월한 한민족’의 기치는 대중 내에서 생성되어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3) 내셔널리즘 분석

히틀러의 나치는 독일 국민에게 게르만 민족의 위대함을 선전했다. 이 선동은 독일 국민이 하는 모든 행위와 사고를 신격화했고, 타자인 유대민족에 대한 탄압과 박해로 연결되었다. 현대의 사회학자들은 스킨헤드의 출현이나 타민족에 대한 린치가 발생하는 요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득권에 대한 박탈감을 느낀 백인층이 잃어버린 박탈감을 채워 줄 위대함을 핏줄에서 찾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몇몇 집단에서 말하는 한국의 중국 지배설, 공자 한국인설 등은 결국 타자와 타민족 위에 군림하고 자신과 자민족을 위대한 선민으로 여기는 선민의식의 발로로 해석될 수 있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는 말이 이처럼 자연스레 구현되기는 요즘이 최고인 것 같다. 중국에서 혐한 랩을 하는 랩퍼까지 등장했고, 이에 대한 한국 누리꾼들은 혐중 감정으로 맞섰다. 양국 누리꾼들의 무분별한 비방 댓글들이 개소문닷컴과 같은 해외 웹 번역 사이트를 통해 ‘소개’되면서 감정의 골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사천성 지진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 올림픽 양궁 결승전 야유 사건이 하루걸러 터지는 요즘, 화해와 이성적 대화를 외치기란 요원하기만하다. 기사가 게시되고 거기에 댓글이 달리고, 다시 그 댓글이 번역되어 댓글의 댓글이 달리는 악순환은 오늘도 계속 진행되고, 안티하는 민족주의 역시 조장되고 있다.

또한 일제에 대한 부정적 기억과 반일주의는 우리 사회에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몇 년 전의 ‘요코 이야기’ 사건. 소설에서 일본인을 겁탈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의 진위 여부 논쟁을 타고 한국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책의 출판은 정지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함경도에는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인민군은 해방 이후 창설됐다)의 오류 지적을 넘어서 책 내용 자체에 대한 토론은 그 당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형기(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한국인의 기억’에서 한국인은 항상 피해자고 일본인은 항상 가해자여야 했는데,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꿔버렸다는 점이 요코 이야기를 용납할 수 없는 이유”라며 이 논란을 한 발짝 떨어진 시각에서 바라본다. 이어서 “‘한국인은 무조건 착하고 일본인은 무조건 나쁘다’라는 이분법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이 책에 화를 낼 수밖에 없었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많은 문제들을 외면했다”고 덧붙였다. 이분법과 일반화는 우리에게 ‘모든 일본인은 나쁘다’라는 터무니없는 사고를 강요한다.

과거 공산당이 ‘공공의 적’ 역할을 하며 사회 통합에 기여했지만, 오늘날엔 일본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는 주장도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의가 국가 상부에서 내려 온 반면, 일본에 대한 적의는 대중에서 유래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