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에세이] <광장> 발간 40주년에 부쳐
[문화 에세이] <광장> 발간 40주년에 부쳐
  • 정과리 /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승인 2001.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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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0월 <새벽>지에 <광장>을 처음 발표하면서 최인훈은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 진술은 그저 이 작품이 체제 비판적인 불온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깥으로부터 들어 온 두 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보여준 최초의 작품이라는 것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광장>과 새 공화국의 관계는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4.19 세대의 인식과 정서 그리고 동경이 통째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학적으로 그렇다.

문학적으로 뭐가 그렇다는 말인가? 그것이 처음으로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는 순수한 ‘개인’을, 다시 말해 자신만의 뚜렷한 성격과 의지 그리고 행동으로 세계와 맞선 ‘문제적 주인공’을 형상화한 소설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서양 소설에서는 근대 소설의 두 개의 시원(始原)으로 흔히 <로빈슨 크루소>와 <돈키호테>가 거론되는데, 그것은 이 소설들이 공동체와 대립되는 존재로서의 개인을 뚜렷이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경우 그 개인은 ‘착란적인’ 형태로 나타났고, <로빈슨 크루소>의 경우 주인공은 ‘부르주아 개인주의 사회’의 이념을 집약하는 응축물로서 나타났다. 로빈슨은 철저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한 사회 이념의 실험적 가능성의 최대치, 즉 대수학적 논리 연산의 결과였다.

한국 소설의 경우, 개인의 출현은 더욱 더딜 수밖에 없었다. 소설(근대적인 의미에서의)이라는 이 괴상망측한 문학 형식이 한국에 도입된 게 서양 문화의 침공 이후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 근대문학은 그 출발부터 빼앗긴 민족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는 공동체의 책무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적 책무로부터 형식적인 수준에서나마 작가가 해방된 것은 정치적 해방이 실제로 왔을 때였다. 아니 그 해방이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실제로 그것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저 해방이 자신의 생활의 틀로 내면화되었을 때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 내면화를 가능케 한 사건이 바로 이승만 독재 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이었고 그때 비로소 정치적인 차원에서 의회민주주의에 기초한 시민국가가 정착되고, 문화적 차원에서는 자국어가 시민들의 실질적인 문화 표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그 이전 세대와 달리 4.19세대는, 김현의 유명한 진술을 빌자면,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글을 쓴” 세대였고, 그들의 한국어는 “토속적 한국어와 사변적 한국어를 변증법적으로 극복한 한국어”(「60년대 문학의 배경과 성과」), 간단하게 부기하자면 생활어로서의 한국어였다.

<광장>의 이명준이 보여준 모험은 이 4.19 세대의 역사적 조건 위에서 태어난 것이다. 독재 정권을 자력으로 무너뜨린 역사를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자기에 대한 확신의 표상이 이명준이었다. 그 점에서 <광장>은 개인주의 사회 이념에 대한 정확한 문학적 상관물을 이룬다. 그렇다는 것은 이명준의 모험이 내용상으로 남쪽의 자본주의와 북쪽의 공산주의라는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두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말할 것 같으면 <광장>의 적들은 둘이 아니라, 적어도 셋이다. 왜냐하면 외래의 두 종(種)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내부에 잠복하고 있는 완강하고도 죽은 유교 이데올로기, 작가가 때로는 ‘아시아적 전제’라는 무시무시한 개념어로 지칭하고 때로는 낡은 솜틀집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비유한, 습속화된 관념체계 또한 적나라한 고발의 법정에 서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명준이 이 모든 공동체의 이념들을 뚫고서 오직 자신의 행동에만 근거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문제적 개인’의 모험을 벌였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험은 헛된 몸부림으로 끝마치고 만다. 이명준이 좌절한 것은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확신을 찾아, 그리고 확신에 추동되어 벌인 모험에 대한 것이었다. 르네 지라르의 표현을 빌자면 ‘낭만적 거짓’의 충만한 체험 끝에 마침내 ‘소설적 진실’의 자리, 즉 ‘모든 것이 헛되다’는 아이러니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이명준은 세계의 이념을 끝끝내 실천하는 행동 그 자체로써 세계로부터 이탈하는 자가 된 것이다.

되풀이해 말하지만 <광장>을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읽는 것은 순진한 짓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러한 독법은 또한 수상쩍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삶의 책임을 다른 데에 떠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든, 역사적 수난이든, 이 떠넘기기에 한국 지식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조직적으로 참여해왔다는 것은 썩 아쉬운 일이며 그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특이한 집단적 불행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는 그 또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집단적 불행이란 모두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요구하면서 모두가 또한 그 책임을 조직이거나 권력 집단이거나 지역감정이거나, 있을 수 있는 모든 가상의 큰 타자들에게로 떠넘기는 사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4.19의 승리와 좌절을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진실과 거짓을, 그리고 그것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세밀히 따져나가면서 말 그대로 세계 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의 의미를 조명하고 그것을 사회적 실행 체계들로 제도화하며 역사를 쌓아 나갔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아주 다른 시간 줄기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광장>을 다시 읽어야 한다면, 바로 그 다른 시간 줄기에 대한 가능성을 운산(運算)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그 작품이 놓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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