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학자들과 연구하라
다양한 학자들과 연구하라
  • 장수영 / 전자 교수
  • 승인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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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연구에 매진한 과학자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뉴턴(Isaac Newton 1642-1727), 라이프니츠(Gottfried W. Leibniz 1646-1716) 등의 연구 결과는 거의 혼자서 이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갈릴레오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속한 학자로 중요한 연구를 하였으며, 라이프니츠는 법학박사학위를 받고 하노바 왕국의 외교관 역할을 하면서 미적분학을 뉴턴과 독립적으로 만들었다. 뉴턴도 혼자 연구를 했으나 왕립학회(The Royal Society)에 나가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다른 학자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많이 있었다.

아벨(Niels H. Abel 1802-1829)과 갈로아(Evariste Galois 1811-1832)는 20대에 요절한 천재들로서 혼자 연구해서 훌륭한 업적을 낸 사람들이다. 미국에도 그런 과학자가 있었는데 바로 통계역학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깁스(J. Willard Gibbs 1839-1903)이다. 그는 32년간 예일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대학원생을 기르지도 않았고 미국 물리학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20세기에 혼자서 연구한 사람으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을 들 수 있다. 그는 1900년에 취리히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베른에 있는 특허사무소에서 일하면서 1905년에 특수상대성이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취리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지금처럼 대학원에 등록해서 강의를 듣고 지도교수 밑에서 연구한 것이 아니고, 분자의 크기에 관한 논문을 제출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중에 교수가 된 후에도 학생을 한 명도 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지도교수도 없었고, 제자도 없는 특이한 과학자였다. 그는 같은 1905년에 그는 광양자 가설, 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 등 도합 여섯 편의 괄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16년에는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였다.


공동으로 연구한 과학자들

20세기 대부분의 빛나는 연구 결과는 한두 사람 개인의 업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여러 학자들의 공동연구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까지 유럽 물리학의 중심은 캠브리지대학, 코펜하겐의 보어 연구소, 괴팅겐대학, 베를린대학, 좀머펠트의 뮌헨대학, 라이프치히대학, 취리히대학과 바로 옆에 있는 취리히연방공과대학(ETH), 그리고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가 있던 로마대학 등이었다고 볼 수 있다.

1) 닐스 보어 연구소
보어(Niels Bohr 1885-1962)는 1911년에 금속의 전도성(電導性)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맨체스터 대학의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 1871-1937) 밑에서 연구하였으며, 1916년에 코펜하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1921년에 비로소 이론물리연구소가 문을 열었는데 1965년에 그 명칭을 닐스 보어 연구소로 바꾸었다.

이 연구소를 방문하여 수개월 또는 1년씩 연구한 물리학자는 35개국에서 444명이었다고 한다. 20세기 전반 유명한 물리학자로서 보어 연구소를 방문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란다우(Lev Landau 1908-1968)는 러시아 사람이지만 보어를 스승으로 생각하였다.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는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보른(Max Born 1882-1970) 밑에서 교수자격 학위(Habilitation)를 받았으나 물리학은 닐스 보어에게서 배웠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많은 젊은 학자들이 수개월씩 보어 연구소에서 연구하려면 많은 예산이 필요하였는데 그 돈은 칼스버그 맥주회사와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칼스버그 맥주회사에는 좋은 저택까지 기부하여 보어는 그 집에서 살 수 있었다.

보어는 박사 학생을 길러내지는 않았으나 지금으로 말하면 많은 ‘박사후 과정(Post-doc)’을 길렀다고 할 수 있다. 보어의 제자 중에는 란다우와 하이젠베르크 외에 크레머스(Hendrik Kramers 1894-1952), 텔러(Edward Teller 1908-2003), 클라인(Oskar Klein 1894-1974), 가모프(George Gamow 1904-1968), 로젠펠트(Leon Rosenfeld 1904-1974)와 일본인 니시나(Yoshio Nishina 1890-1951) 등이 있다.


2) 러더포드-캠브리지대학
러더포드는 고향 뉴질랜드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895년에 캠브리지대학에 유학을 갔는데 그 당시 캠브리지대학에는 다른 대학 졸업생들이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러더포드는 2년 간 공부한 후 학사학위(BA Research Degree)를 받았는데, 1898년에 캐나다의 맥길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1907년부터 12년간 맨체스터대학 교수로 있었는데, 그때 원자가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발견했다. 1919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캠브리지대학에서 캐벤디쉬 석좌교수(Cavendish Professor)로 있으면서 7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당시에 연구비가 충분했던 것은 아니고 러더포드의 놀라운 실험적 능력과 통찰력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러더포드 제자 중의 한 명인 카피짜(Peter Kapitza 1894-1984)는 소련 사람인데 캠브리지대학에 13년이나 있으면서 러더포드의 사랑을 받고 왕립학회 회원도 되었다. 카피짜는 카피짜 클럽을 만들어, 물리학자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었는데 연사가 의심스러운 발표를 하면 가차 없이 공격하였다.

러더포드의 제자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 은 1932년에 중성자를 발견하였고, 블라켓(Patrick Blackett 1897-1974)은 감마선에서 전자와 양전자쌍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3) 하이젠베르크-괴팅겐대학

1925년 5월 하이젠베르크가 괴팅겐대학의 막스 보른 교수 밑에서 조수로 일할 때 심한 알레르기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독일 북쪽에 있는 섬 헬고란트에 혼자 요양을 갔는데 거기서 양자역학의 첫 번째 논문을 썼고 이것을 막스 보른에게 보여주었다. 보른은 이 논문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학술잡지에 보낸 후, 혼자 며칠간 그 논문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하이젠베르크의 방정식은 바로 매트릭스 곱하기라는 것을 알아냈고 라는 식을 유도할 수 있었다. 괴팅겐에 있는 보른의 묘비에는 그 식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1926년 초 슈레딩거(Erwin Schrodinger 1887-1961)는 양자역학의 다른 형태인 파동역학을 발표했고 난해한 하이젠베르크의 매트릭스 역학보다 쉽게 물리학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보른은 슈레딩거보다 먼저 파동방정식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나 슈레딩거는 드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의 박사 논문에서 파동방정식의 영감을 얻었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이젠베르크가 첫 번째 논문을 쓸 때 그는 매트릭스를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다. 물론 곧 매트릭스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만 26세가 되기 전에 라이프치히대학 정교수가 되었고 거기서 부로흐(Felix Bloch 1905-1983), 텔러, 파이엘스(Rudolf Peierls 1907-1995) 같은 물리학자들을 길러냈다.


4) 솔베이 회의(Solvay Conference)
20세기 물리학의 발전에는 1911년에 시작된 솔베이 회의가 큰 역할을 하였다.

화학공장 사업으로 부자가 된 솔베이(Ernest Solvay 1838-1922)가 최고 수준의 물리학자들을 초청해서 브뤼셀에서 연구 발표를 하도록 하였다. 첫 번째 회의 주제는 복사이론과 양자(Radiation Theory and Quanta)였으며 로렌츠, 플랑크, 좀머펠트, 러더포드, 큐리부인, 아인슈타인 등 20명이 참석했다. 그 후 1913, 1921, 1924, 1927, 1930, 1933년에도 열렸으며 2차 대전으로 못 열리다가 1948년에 다시 열렸다. 1927년 회의에서는 양자역학에 관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유명한 논쟁이 있었고 보어가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것은 참석자들은 각자 자신의 국어로 발표했고 모두 이해했다는 점이다.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디락 등 20대의 물리학자들이 1927년 회의 때 처음으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나 한국인은 아무도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글을 마치며

우리나라의 물리학연구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지도교수 한 사람 밑에서 많은 대학원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가능한 한 많은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바로 그 대학의 조교수가 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된다. 반드시 수년간 다른 곳의 연구환경에 노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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