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물음] 8. 그래도 할 일은 한없이 많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물음] 8. 그래도 할 일은 한없이 많다
  • 박이문 / 전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00.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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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든 모르든 죽을 수 없고, 의미가 있든 없든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은 곧 부단한 행동이며, 싫든 좋든 우리는 살아있는 한 언제나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하여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아무 것도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알려고 애써야 하고, 아무 것도 말이 되지 않으니까 무엇이라도 말이 되게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또 총체적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말이 되지 않아도, 그래도 할 일은 한이 없다. 총체적인 진리가 없더라도 부분적인 진리는 무한하고, 궁극적으로 말이 되는 것이 없더라도 피상적으로 말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무한한 시간이 없더라도 유한 시간은 무수하며, 절대적인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더라도 상대적인 것은 허다하다. 영원한 삶이 불확실하더라도 유한한 삶만은 분명하고, 근원적 의미를 깨달을 수 없더라도 잠정적 의미는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부분적인 것을 조금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것 속에 존재하며, 부분적 진리를 떠난 총체적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 무한한 단 하나의 시간은 유한한 그러나 무수한 시간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상대적인 것을 떠난 절대적인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불확실한 것이 없는 한 확실한 의미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하나 하나의 개별성을 떠난 총체성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경험적 속세를 떠난 천당은 생각할 수 없으며, 고통스러운 무상한 이승을 떠난 열반의 영원한 저승은 상상할 수 없다. 영원과 시간, 무한과 유한, 저승과 이승, 천당과 속세, 보편성과 상대성, 깨달음과 무명, 지식과 무식, 전체와 부분, 진리와 무지, 선과 악, 의미와 무의미, 충만과 허무, 빛과 어둠, 우주와 자연, 자연과 인간, 무위와 행동은 그 어느 쪽 하나를 떼어 생각할 수 없이 무한하고 또한 유한하며, 단순하고 또한 복잡하게 서로 뗄 수 없이 얽혀있고 서로 뒷받침함으로서만 존재하고 의미를 지닐 수 있는 크나큰 하나인 동시에 무수한 다수이다.

너와 나, 우주, 자연, 인간은 다같이 그리고 한결같이 무한 속의 유한인 동시에 유한 속의 무한으로, 저승 속의 이승인 동시에 이승의 저승 속에서, 빛의 어둠인 동시에 어둠의 빛으로, 절대자의 상대자인 동시에 상대자의 절대자로, 자연의 인간인 동시에 인간의 자연으로, 마음의 몸인 동시에 몸의 마음으로, 삶의 죽음인 동시에 죽음의 삶으로, 깨달음의 무명인 동시에 무명의 깨달음으로, 충만의 허무인 동시에 허무의 충만으로, 무위의 행위인 동시에 행위의 무위로, 의미의 무의미인 동시에 무의미의 의미로서만 존재한다.

보기에 따라 각자의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아무 것도 없는 [空](공)이지만 또한 달리 보기에 따라 그것은 충만한 [存在](존재)이며, 느끼기에 따라 모든 존재와 행동은 속이 텅 빈 무의미한 [虛無](허무)이지만 또한 보기에 따라 그것은 속이 꽉 채워진 황홀한 [意味](의미)를 지닌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차피 우리가 언제인가 죽어 한줌의 흙으로 사라지는 존재라면 몸과 마음으로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무 것도 없지만, 또 달리 생각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없이 많으며, 우리와 우리 이외의 모든 존재 자체, 그러한 존재로서의 존재의 구체적 기쁨과 의미는 오로지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할 수많은 일들 속에서만 체험될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궁극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이제 우리는 무엇인가의 구체적인 나름대로의 투명한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되었고, 얼마 전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절대적으로 해야만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우리는 작지만 나름대로 할 일이 한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할 일이 있으며, 그러한 것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알고 보면 사소하지만 그래도 할 일이 무한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시시하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로 충만해 있다.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더라도 수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러한 것들을 더 배워야 한다. 더 보고, 더 듣고, 더 읽고, 더 생각할 일이 있고, 그 뜻을 조금 더 파악하기 위해서 한 번 읽었던 책을 또 한번 다시 읽어야 할 일이 있다. 가봐야 할 미술전람회, 들어야 할 음악회, 빠져서는 안될 강연회가 있다. 자연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감상할 일이 있으며, 인간의 놀라운 지적 및 도덕적 능력에 감탄과 경의를 표현해야 할 일이 있다. 저녁때가 되면 고달파도 빠져서는 안될 영어학원, 컴퓨터학원이 있으며, 걸러서는 안될 서예, 그림, 음악 공부가 있다. 방을 깨끗이 치우고, 창문을 열어 맑은 공기를 갈아넣고, 책상을 말끔히 정리하고, 밀린 편지를 쓸 일들이 있다. 화분에 물을 주고, 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메마른 논에 물을 대야할 일이 있다. 남편이 잡아 온 오징어의 배를 따서 통풍이 잘되는 곳에 말릴 일이 있다. 시장에 가서 반찬거리를 사다 남편이 직장에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저녁상을 준비할 일이 있다. 밤이면 너무 늙기 전에 부부가 할 사랑이 있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젖은 기저귀를 빨아야 한다. 애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박사학위를 받거나 고시에 합격해서 수입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자리를 차지하도록 뒷바라지 할 일이 있다. 연로하신 할아버지의 시중을 들고, 병석에 누어 계신 어머님을 간호해야 할 일이 있다. 실직한 친구의 고통을 달래면서 슬픔을 함께 나눌 일이 있고, 친지를 문상갈 일이 있고, 친구의 자녀 결혼식에 부조금을 갖고 참석할 일이 있다. 치과의사한테 가서 충치를 빼고,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 뱃속의 종기를 도려내야 할 일도 있다.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불러야 할 일이 있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야 할 일이 있다. 멀리 출장갈 일이 있고, 상관한테 인사를 가야 할 일이 있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철학적 문제가 있고, 따져봐야 할 종교적 문제가 있다. 준비해야 할 강의가 있고 마감에 맞추어 써야 할 원고가 있다. 멀리서 온 친구를 만나러 공항에 갈 일이 있고, 술김에 잃고 온 수첩을 찾으러 다시 지하철을 타고 식당까지 갈 일이 있으며, 카센터에 가서 차를 수리해야 할 일도 있다. 깜박 켜둔 채 나온 전기불을 끄러 집에 돌아가 봐야 할 일이 있고, 밀어 두었던 쓰레기 처리를 해야한다. 자선사업에 참여할 일이 있고, 인권, 여권, 동물권 운동에 참가할 일이 있다. 환경운동에 나서야 하고, 생태계보호에 발벗고 나서야 할 일이 있다.

쓸개까지 썩은 정치가의 실태를 들춰내며, 돈만을 위해 무자비한 자본가의 정체를 캐내야 할 일이 있다. 영웅심리에 도취되거나 패권을 위해 선동하는 위선적 이념가들의 허상을 벗기고, 꾀, 거짓, 사기, 도둑의 도덕적 병마에 걸린 우리 모두의 양심의 정체를 진단하고 치유해야 할 일이 있다. 궤변으로 지성을 교란시키려는 오만한 철학자의 주장의 오류를 정직한 논리로 지적해야 할 일이 있고, 독선적 설교로 지성을 모욕하고 투명한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는 광신적 신자의 환각을 깨우쳐야 할 일이 있다.

보이지 않는 총칼로 우리를 지배하려드는 크나큰 외세를 경계해야 할 일이 있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시민의 복지를 짓밟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타도하기 위해 거리에 나서 화염병을 던져야 할 일이 있다. 각계 각층,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작고 큰 폭력에 시달리는 수많은 어린이들, 노약자들, 부녀자들, 노동자 농민, 평사원, 말단 공무원, 학생, 교원들에게 도움의 손을 뻗쳐야 할 일이 있다. 가난으로 눈물이 글썽한 달동네의 주민들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물질적 도움을 주어야 할 일이 있고, 장애인, 정박아들의 상처를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보이는 세상이 넓다면 지구는 더 넓고, 지구가 보이는 세상보다 더 넓다면 물리적 우주는 방대하며, 물리적 우주가 방대하다면, 사유의 세계는 무한하다. 넓은 보이는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면, 보이는 세상보다 더 넓은 지구에서 할 일은 그만큼 더 많다. 넓은 지구에서 할 일이 많다면, 지구보다 더 넓은 우주에서 할 일은 한층 더 많으며, 우주에서 할 일이 그렇게 많다면 무한한 사유의 세계에서 할 일은 더욱 무한하다.

내 눈앞에 우뚝 선 푸른 전나무가 높고 아름답다면, 내 마을 앞에 늠름하게 선 저 산은 더 높고 아름답다. 산이 높고 아름답다면 하늘은 훨씬 더 높고 더 아름답다. 하늘이 높고 아름답다면, 사유의 세계는 무한히 높고 무한히 아름답다. 눈을 바로 뜨고 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높고, 조용히 느끼고 생각해 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숭고하고 성스럽다. 그 높고, 숭고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올라가는 길은 한없이 길고 고되지만, 그만큼 환희와 의미로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해 준다.

이같이 환희와 의미로 채워진 존재의 정상이 넓고 높음에 비해 너무나 짧은 우리의 인생이기에 할 일은 너무 많아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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